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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판문점의 공산주의자들 (123) 전선을 끌어올리기

김일성과 남일을 대표로 하는 북한 공산주의자와 전선과 휴전회담장에서 마주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조금 달라 보였다. 같은 공산주의자들이었지만 생각하는 방식이나 사물과 현상을 두고 대처하는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저들에 대한 인상을 곰곰이 정리할 때 들었던 생각이 있다. 그동안 북한이 저렇게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체제를 구축한 것, 중국이 겉으로 봐서는 자본주의인지 공산주의인지 모를 정도로 기묘하게 실용적인 체제를 발전시킨 것은 나름대로 배경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평양~원산까지 휴전선 북상”… 38선 복귀론에 내가 받아쳤다

얼굴에 파리가 기어 다녀도 꼼짝 않고 상대를 노려봤던 이상조 식의 공산주의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얼굴에 띠면서 부드러움을 보이지만 머릿속으로는 모든 것을 따져보는 셰팡(解方)식의 공산주의는 뭔가 다를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런 차이가 오늘날의 북한과 중국으로 하여금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에서 극단적인 독재와 부드러운 실용주의로 각자 다른 길을 걷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에 정리한 생각이다.



나는 그때 한국을 대표해서 회담장에 나와 앉은 사람으로서 공산주의자들과 휴전을 한다면 그 경계선은 어디로 그어야 하는가를 두고 자주 고민에 빠졌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대한민국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훈령(訓令)은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회담이 이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대한민국에 유리한 조건을 반영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유엔 측이 절대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는 제공권(制空權)과 제해권(制海權)을 염두에 두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중과 해상에서 저들의 전력은 형편없었다. 그에 비해 미군의 공군기와 해상 작전 능력은 압도적이었다. 이를 활용한다면 휴전선을 훨씬 북상시켜 아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곳에 설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회담이 이어지고 있던 어느 날 터너 조이 제독과 단독으로 만나 이 문제를 거론했다. 나는 조이에게 “제독, 아무래도 우리가 공군력과 해군력에서 탁월한 전력을 확보하고 있으니 전선을 북상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을 꺼냈다. 조이 제독은 “그럼, 백 장군은 어디까지 전선을 올려야 한다고 보느냐”고 물으면서 관심을 기울였다.



나는 “평양과 원산을 잇는 평원선으로 전선을 올리자”고 말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를 그에게 말해줬다. 나는 비교적 자세히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북방의 적을 맞을 때 한반도에서는 이 방어선을 활용했다. 그 선은 자연스러운 방어선이다. 천연적인 방어 환경이 잘 발달해 있고, 그 이북으로는 곡창(穀倉)이 발달하지 않은 산악지대만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조이 제독은 “그럴 듯하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I’ll buy it)”고 선뜻 응답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 휴전회담에서 조이 제독은 이 평원선을 휴전선으로 하자는 제안을 공산 측 대표들에게 꺼냈다. 그들이 받을 리가 없었다. 공산 측 수석 대표인 남일은 “도대체 우리를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느냐”라는 반응이었다.



휴전회담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는 우리 측과 공산 측 사이의 경계선을 어디로 잡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의 정가와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는 공산군을 더 몰아 휴전선을 북상시키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왼쪽에서 셋째부터 오른쪽으로 백선엽 장군, 터너 조이 제독,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의 모습이다. [미 육군부 자료]
사실 그것은 말로 할 필요가 없었다. 공격을 감행해 평양과 원산을 잇는 지역으로 전선을 물리적으로 밀어 올리면 되는 일이었다. 조이 제독의 제안에서 그칠 차원이 아니었다. 도쿄의 유엔총사령부가 승인해 직접 공격명령을 내려야 하는 단안(斷案)이 필요했던 것이다.



회담 진척 상황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문산의 평화촌으로 자주 날아오는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총사령관(극동 연합군 최고사령관)을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평양과 원산을 잇는 평원선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를 않았다.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라는 식으로 냉랭하게 굴었다.



그렇지만 나는 “공산군의 무리한 요구를 듣고 앉아 있지 말고, 우리도 무리한 주장으로 맞서야 한다”면서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 선까지 제한적인 공격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지 않느냐”면서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리지웨이는 “아군이 현재 그 선까지 진출해 있지 않다면 그런 논의는 필요가 없다”며 “설령 그 선까지 치고 올라가더라도 아군이 너무 많은 희생을 해야 한다”고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리지웨이는 특히 보급선이 길어지는 점, 전면공격을 감행하기 위한 병력 및 교량자재 부족을 그 이유로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다음 복안을 꺼냈다. 나는 “리지웨이 사령관, 지금 공산 측 제안을 받아들여 38선 부근에서 휴전선을 획정한다면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의 한강이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말할 게 있으면 말해 보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경계를 긋는다면 한강은 곧 죽은 강(Dead river)으로 변한다. 통항(通航)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북한 쪽으로 향하는 한강 하구에 배가 다닐 수 없어 대한민국 수도의 강이 죽는다는 것을 한국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는가”라고 말했다. 나는 내친 김에 “그를 막기 위해서는 전선을 북상시켜 예성강만이라도 확보해야 한다. 그 강을 경계선으로 해서 적군을 막을 수 있으니 전선을 그곳까지는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지웨이는 과감한 성격이다. 그렇지만 남의 말을 무조건 거부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내 말을 한참 동안 듣던 리지웨이는 “아무래도 어려운 제안이다”라고 대답했다. 비슷한 이유를 댔다. 아무래도 전선 확대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그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미군을 한국땅에서 철수시키려는 워싱턴 미 행정부의 입장에 더 관심이 많았다. ‘지금 이 자리에 더글러스 맥아더가 있었더라면….’ 1951년 4월, 부산에서 맥아더 장군의 해임 소식을 듣고 안타까워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표정이 그 순간 내게 다시 떠올랐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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