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그때 오늘] 백범 김구 선생 국민장 거행하다

 
  1949년 7월 5일, 열흘 전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진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의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사진은 영구가 서울 소공동을 지나는 모습을 담고 있다(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소장).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라고 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도 더욱 소리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답할 것이다.” 그의 말이 귓전을 울린다.
 
김구가 태어난 1876년은 문명의 기준이 중화에서 서구와 그 아류인 일본으로 역전되고, 이 땅을 둘러싼 국제정치 환경도 의례를 중시하는 도덕률(moral politics)에서 힘의 정치(power politics)로 뒤바뀐 대전환의 해였다. 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으로 상놈 대접을 받고 살아야 했던 그는 입신출세를 꿈꾸며 과거 공부에 몰두하다 1894년 동학군의 봉기에 참여한 반서구·반일 성향의 전통적 유교 지식인이었다. 또한 그는 1896년 청일전쟁 이후 거세진 일본의 침략에 맞설 방도로 중국과의 연대를 모색하고자 두 차례나 중국행을 단행한 친중파였으며, 명성황후 시해 후 ‘국모보수(國母報讐)’를 위해 일본인을 살해해 투옥된 근왕주의자였다.

1897년 그는 인천감옥 수감 중 접한 『태서신사(泰西新史, 원제 ‘The 19th Century: A History’)』 등 신서적을 부리 삼아 굳은 알껍데기를 깨고 나왔다. “스승이 평소에 강조하던 존중화(尊中華)·양이적(攘夷狄) 주의가 정당한 것이 아니며, 제 소견에는 오랑캐에게서 배울 것이 많고, 오히려 공자나 맹자에게는 버릴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스승의 가르침에 맞설 정도로 그때 깨침의 강도는 컸다. “빗장을 걸어 잠그고 지키기에만 급급하던 사람들이 겨우 서양 선교사들의 혀끝으로 바깥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 말을 자주 들은 사람들은 신앙심 말고도 애국사상도 갖게 되었다.“ 1902년 기독교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새로운 문명 인식은 활짝 꽃 피었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그때 그는 잠든 민족에게 깨어나라 외친 겨레의 목탁이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새로 올 나라의 시민이 되길 꿈꾼 1919년 3·1운동의 결과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그는 26년간 구국을 위한 일념을 불태웠다.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독재정치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그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백범일지』, 1947).” 광복 직후 그는 이승만과 함께 반공·반소·반탁의 입장에서 공통의 노선을 걸었지만, 냉전의 그림자가 조국의 앞날에 어둡게 드리우던 그 시절, 그는 현실주의자 이승만과 결별했다. “병자호란의 역사를 알지? 그때 청과 타협한 최명길의 현실주의가 없었던들 아마 나라는 망했을 거야. 동시에 3학사의 명분론과 죽음을 감수하는 민족의 기개가 없었던들 또 망하는 거야.” 그는 자신의 남북협상 노력이 실패로 끝날 줄 알고 있었지만 북행에 앞서 차남 김신에게 남긴 말이 웅변하듯, 하나 되는 민족의 앞날을 위한 제단에 자신을 바쳤다. 탈냉전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는 그가 내준 숙제를 마쳐야만 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