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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활자 대장간’서 만들지요, 사람 냄새 나는 시집

처음에는 다들 반신반의했다. “과연 책을 낼 수 있을까.” “책을 낸다 해도 사업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런 걱정들이었다.



국내 유일 활판 인쇄소 ‘활판공방’

2007년 11월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 문을 연 ‘출판도시 활판공방’(이하 공방)은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활판 인쇄소다. 활판 인쇄란 납 활자를 문선공(文選工)이 일일이 채자(採字)하면 이를 조판(組版)한 뒤 인쇄·제본하기까지 출판의 전 공정을 사람 손으로 해내는 방식이다. 1980년대 들어 공정이 훨씬 간편한 사진식자 인쇄방식이 도입되면서 활판 인쇄는 급속도로 사라졌다. 인건비가 많이 드니 채산성도 당연히 떨어진다.



공방은 2008년 8월 이근배(70) 시인의 시선집 『사랑 앞에서는 돌도 운다』, 김종해(69) 시인의 시선집 『누구에게나 봄날은 온다』를 한꺼번에 펴냈다. 중진 이상 원로급 시인들의 시선집을 시리즈로 내는 공방의 주요 사업 ‘활판공방 시인 100선’의 첫 번째 소산이었다. 그로부터 2년 가까운 기간에 공방은 14권의 시선집을 더 펴냈다. 미당 서정주 등 시선집 5권을 연내 추가로 낼 계획이다. 다행스럽게 공방 문을 닫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비결이 뭘까.



#대량 복제본이 아닌 ‘수공 예술품’



최근 공방을 한번 찾아가 인쇄 과정을 살펴봤다. 330㎡쯤 되는 공방의 절반 면적에 납 활자를 만드는 주조기와 나머지 4개 공정과 관련된 기계가 빼곡하다. 인쇄소라기보다는 대장간이나 영세공장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소음이 컸다. 납 활자는 소모품이다. 1000장 정도 찍으면 활자 끝부분이 마모돼 새 활자를 써야 한다.



그 때문에 필요한 활자를 그때그때 만들어내는 주조공이 활판 인쇄소에는 꼭 있어야 한다. 이 공방의 주조공 정흥택씨는 올해 일흔이다. 10대 중반에 일을 배워 마흔 가까운 1979년까지 납 활자를 만들었다. 그는 주조기 앞에서 기계가 쏟아내는 대로 성냥개비보다 조금 굵어 보이는 따끈따끈한 납 활자를 주조기 한쪽 상자 안에 묵묵히 담고 있었다. “이런 일을 하는 데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냐”고 묻자 “기계 고장 나면 고치는 게 더 큰 일”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공방의 박건한(68) 주간은 “문선 20일, 조판 2주일, 인쇄 10일, 제본 20∼30일 걸리니 공방에서 시선집 한 권 만드는 데 두 달 이상 걸린다”고 했다. 1주일쯤 걸리는 오프셋, 디지털 인쇄에 비하면 거북이 걸음이다. 이렇게 만들다 보니 공방의 시선집은 책이라기보다 예술품 느낌이 난다. 한지 위에 인쇄해 글자에서 오톨도톨한 질감마저 느껴진다.



#채산성 어떻게 맞추나



시선집만 팔아서는 이익을 낼 수 없다. 시선집은 한 권에 5만원, 1000부만 찍는다. 700부쯤 팔리면 손익분기점이다. 우선 시선집을 내는 시인이 몇백 부 사준다. 시선집이 나오면 빠짐없이 구입하는 장서가 겸 독자층도 30명쯤 된다. 이런 독자에게는 1번부터 1000번 중 번호를 하나 고르게 한 뒤 그 번호의 시선집만 갖도록 배려한다. 시인이 직접 쓴 감사의 말도 제본해 끼워 넣는다. 시리즈를 빠짐없이 구입해온 주부 유수연(55·서울 번동)씨는 “한지 감촉이 좋은 책을 손에 들고 감미로운 시를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말했다.





공방은 대학교 타이포그래피 전공 학생들의 인기 체험 코스이기도 하다. 서울대·홍익대·한국예술종합학교·사디(SADI, 삼성디자인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다녀갔다.



공방의 박한수(42) 대표는 “지난 1년간 학생들이 내고 간 체험료 수입이 1000만원쯤 된다”고 했다. 박 대표는 박물관 도록(圖錄)을 주로 출간하는 출판사 ‘시월’에서 생기는 수익금을 공방 살림에 보탠다.



박 대표는 공방을 2002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전국을 다니며 활판 인쇄 기계를 수집했다. 박 대표는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를 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에서 사진식자로 넘어가는 중간고리인 활판 인쇄가 사라지는 일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파주=신준봉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활판 인쇄는 …



1 주조



섭씨 350도 고온에서 생납·폐납을 녹여 납활자 제작. 활자 크기가 클수록 주조기 냉각에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단위시간 당 생산량 적어.



2 문선



활자 선반에서 활자 뽑는 작업. 활자 선반은 사용 빈도에 따라 ‘대출’ ‘소출’ ‘벽자’로 구분.



3 조판



활자와 공목 사용해 실제 책의 쪽과 똑같은 형태로 판을 짜는 공정.



4 인쇄



1시간에 1000∼2000쪽 인쇄. 인쇄기에 종이를 손으로 밀어넣음.



5 제본



접착제로 책등에 면을 붙이고 책 표지 씌우는 등 출판의 마지막 공정. 시선집의 경우 하루에 50권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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