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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 출신 지식인 등용으로 노론의 특권 카르텔에 맞서다

청나라 나양봉이 그린 박제가 초상. 조선에서는 서자라고 천대받았던 박제가는 이미 청나라에 문명(文名)이 알려져 있었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정조⑤ 북학파의 ‘도발’
임란 때 백성들이 불을 지른 형조와 장예원은 노비(奴婢) 관할 부서였다. 신분제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그만큼 컸다는 뜻이었다. 국망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한 것은 재상 류성룡의 개혁 입법들이었다. 면천법(免賤法)으로 노비 출신들도 군공(軍功)을 세우면 속량(贖良: 양인으로 만듦)시켜주고 벼슬까지 준 것이 이를 말해준다(쫓겨난 임금들-선조편 참조).

류성룡의 개혁 입법으로 떠났던 민심이 돌아오면서 조선은 되살아났다. 그러나 전란이 끝나자 선조와 양반 사대부들은 류성룡을 실각시키고 그가 전시에 도입했던 각종 개혁 입법들을 무효화시켰다. 그렇게 조선은 과거의 신분제로 되돌아갔다.

신분제가 완화 내지는 철폐될 것으로 예상했던 백성들은 분노했다. 노비 도망이 조선 후기의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신분제의 질곡에 신음한 계급은 노비만이 아니었다. 서자(庶子)들도 마찬가지였다. 양반가에서 태어난 서자들은 적자(嫡子) 못지않은 학문이 있었음에도 모친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차별에 시달렸다. 이런 신분제는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신분제는 조선이 미래로 가는 것을 막는 암적 존재였다.

<1> 북학의 북학파라는 말은 박제가가 쓴 『북학의』에서 비롯됐다. <2> 발해고 유득공은 발해를 민족사의 강역으로 포함시키는 획기적 역사관을 피력했다.
이미 양반 사대부들의 학문 독점은 붕괴됐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백탑파(白塔派)다. 현재의 서울 종로 2, 3가 일대는 원각사가 있었기 때문에 대사동(大寺洞) 또는 큰절골로 불렸다. 원각사의 ‘흰색 10층 석탑(白塔)’ 부근에 살던 지식인 집단이 백탑파였다. 박제가(朴齊家)의 정유각문집(貞<8564>閣文集)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등은 백탑 부근에 박지원·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이 살았다고 전하고 있다. 종실(宗室)인 통덕랑(通德郞) 이성호(李聖浩)의 서자 이덕무(李德懋)가 영조 43년(1767) 백탑 부근으로 이주하고 이듬해 양반 출신이지만 스스로 시대의 이단아가 됐던 박지원(朴趾源)이 이주하고, 유득공·서상수·윤가기·이희경 등 서얼 지식인들이 뒤따라 이주해 지식인 촌락이 형성된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 선비였던 이덕무의 호는 청장관(靑莊館)인데, 해오라기 종류의 물새, 청장(靑莊)은 눈앞에 있는 먹이만 먹고 사는 청렴한 새였다. 서자로서 이런 호를 가졌던 이덕무가 극도의 곤궁에 시달린 것은 당연했다. 이덕무는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지난겨울 내 작은 초가가 너무 추워서 밤중에 일어나 창졸간에 한서(漢書) 한 질을 이불 위에 죽 덮어서 추위를 조금 막지 않았다면 얼어 죽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또 노론(魯論) 한 질을 병풍처럼 둘러 바람막이로 쓰고는 “경사(經史)로 만든 한서 이불과 노론 병풍이 금은으로 조각한 병풍보다 낫다”며 안빈낙도(安貧樂道)를 말하기도 했다. 진사(進士) 유관(柳璉)의 서자 유득공은 이덕무의 제자로부터 “밥을 짓지 못한 지 벌써 이틀째”라는 말을 듣고 “아, 옛날의 도가 높은 선비(高士)도 이에 지날 수 없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유득공도 자신의 생활에 대해 “비록 끼니는 자주 걸렀어도 기색은 태연자약했다”고 빈궁했음을 회고했다. 박제가의 어머니는 북촌 사대부집의 삯바느질로 아들을 공부시켜 당대 제일의 학자로 만들었으나 조선에서 이들의 지식은 쓸 곳이 없었다.

박제가는 정조 즉위년(1776)에 쓴 소전(小傳)에서 “어려서는 문장을 배웠고, 커서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 생활을 구제하는 학문(經濟之術)을 좋아했다. 수개월을 집에 가지 않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지금 사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라고 신분제에 절망했다. 그러나 이들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614D>, 不亦君子乎)’란 논어 학이편의 구절처럼 자신의 입신보다 나라의 앞길을 더욱 걱정한 선비들이었다.

현실에서 소외된 이런 선비들이 모여서 실학의 한 주류인 북학파, 즉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인 이용후생(利用厚生)학파를 형성했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은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배우자는 것이었다. 집권 노론은 숭명반청(崇明反淸) 사상으로 청나라를 부인했지만 현실에서 소외된 지식인 집단은 그들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그 결과 북학(北學)을 주창한 것이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정조 2년(1778) 3월 상사(上使) 채제공, 서장관 심염조(沈念祖)와의 친분으로 처음 북경에 갔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은 이미 북경에 알려져 있었다. 유득공의 숙부 유련(柳璉)이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의 시 399편을 모은 건연집(巾衍集)을 가지고 정조 즉위년(1776) 부사 서호수(徐浩修)의 막관(幕官:참모)으로 연경(북경)에 가서 청나라 지식인들에게 소개한 덕분이었다. 이 시집을 보고 크게 감동한 반정균(潘庭均)·이조원(李調元) 등의 청나라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서문을 붙여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란 이름으로 북경에서 출간했다. 그 덕분에 이미 문명(文名)이 청나라까지 알려졌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홍대용은 북경 기행문인 연기(燕記)에서 청나라의 발전상을 묘사해 이덕무·박제가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덕무도 북경에 다녀와 입연기라는 기행문을 써 청나라가 이미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라 조선이 뒤따라야 할 선진국이라고 주장했다. 박제가는 기행문 대신 북학의(北學議)를 썼는데 ‘북학(北學)’의 원래 뜻은 중국 남부의 지식인 진량이 북쪽 중국에서 유학을 배운다는 뜻이지만 박제가는 청나라를 인정하고 배우자는 뜻으로 사용했다. 이들을 북학파라고 부르는 것은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겉으로는 매년 사신을 보내며 사대하면서도 속으로는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멸시하는 조선 성리학자들의 이중적 처신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청나라를 배우자고 주장하는 것은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이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지금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곤궁해지고, 재정은 날로 궁핍해지고 있다. 무릇 사대부로서 장차 팔짱만 낀 채 구제하지 않을 것인가? 과거의 인습에 안주해 편안한 안락을 누리면서 아는 것을 모른 체할 것인가?”라고 한탄했듯이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아파하면서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이 북학이었다. 과거였다면 노론의 당론을 거스르는 서자 출신 지식인들의 개혁안이 쓰일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러나 즉위 이전부터 서자 출신 지식인 집단을 주목했던 정조가 국왕이 되면서 상황이 변화할 조짐이 일었다.

정조가 고대 은(殷)나라에서 성 쌓다가 발탁된 부열(傅說)과 주(周)나라 때 낚시질하다 발탁된 여상(呂尙)에 대해 자주 언급한 것은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려는 구상을 내비친 것이었다. 정조는 재위 1년(1777) “아! 저 서류(庶流)들도 나의 신자(臣子)인데, 그들로 하여금 제자리를 얻지 못하게 하고 또한 그들의 포부도 펴보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또한 과인의 허물인 것이다”라며 이조와 병조에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을 작성해 올리라고 명했다. 서얼들의 벼슬길 진출을 허용하는 법을 만들라는 지시였다. 서류소통절목이 반포되면서 서자들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재위 3년(1779)에는 도승지 홍국영의 건의를 받아 이덕무·박제가·유득공·서리수 등 네 명의 서자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채했다. 교서관(校書館)의 정원 네 자리를 규장각으로 돌려서 임용한 것이었다. 이렇게 발탁된 4명의 검서관들은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라는 보통 명사로 불리며 조선의 지식계를 주도했다. 그간 신분제의 질곡에 얽매어 있던 머릿속의 지식이 규장각 검서관이란 날개를 달자 하늘 높이 비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당초 이들의 문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조는 훗날인 재위 21년(1797) 각신 이시원(李始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덕무·박제가 무리는 문체가 전적으로 패관(稗官)·소품(小品)에서 나왔다. 이들을 내각(內閣:규장각)에 두었다고 해서 내가 그 문장을 좋아하는 줄로 아는데, 이들의 처지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이로써 스스로 드러내도록 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덕무·박제가 등의 문체는 패관소품이지만 ‘처지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등용했다는 뜻이다. 능력은 있지만 현실에서 소외된 이들을 발탁하는 것이 정조의 남다른 인재등용관이었다.

이렇게 등용된 인재들은 사회의 변두리에서 시대의 한복판으로 뛰어오르며 북학을 현실의 이론으로 만들었다. 정조는 또한 대대로 세습되는 노비들의 처지도 깊이 동정하여 고용 노동제로 바꾸는 방안을 구상했으며, 여성들의 재가 금지에도 강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었다. 사회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층 때문에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정조는 신분제의 완화 내지는 철폐가 미래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정조는 소외된 인물들과 손잡고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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