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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한뎃잠에 영혼 찌들었던 ‘거리의 남자’ 희망을 쏘다

대전에서 태어났지만 누가 고향을 물으면 나는 충북 보은이라고 답한다. 태어나자마자 먼 친척집으로 입양됐기 때문이다. 1958년 10월 7일. 내 생일은 친어머니의 기일(忌日)이다. 생모는 나를 낳다 세상을 떴다. 양어머니는 열여덟에 시집와 1년도 안 돼 청상과부가 됐다. 어머니는 그 한(恨)을 나에 대한 사랑으로 풀었다. 다섯 살에 천자문을 떼자 할아버지는 “가문의 경사다, 가문의 경사야” 하시면서 인근 동네 100가구에 떡을 돌리셨다. 그래야 손자 놈이 장차 크게 된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100가구를 채우기 위해

떡 보퉁이를 이고, 들고 이웃 마을까지 발품을 팔았다. “이 땅도 저 땅도, 이 논도 저 논도 다 네 거다.” 할아버지는 철부지 내 손을 잡고 논길을 걸으며 말씀하셨다. 소설 『소공자』의 주인공처럼 나는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는 부잣집 도령으로 자랐다.

사랑과 화투

‘주워 온 놈’.

평생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내 주먹에 코피를 흘린 친구의 어머니는 분을 삭이지 못해 그렇게 말했다. 나만 모른 출생의 비밀을 친구 엄마는 알고 있었던 거다. 하늘이 노랬다. 나도 모르게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그 말이 진짜냐. 사실대로 말해달라.” 단식 투쟁까지 하는 내게 어머니는 말했다.

“그래도 너는 내 아들이다.”

어머니의 위로가 가슴을 적시진 못했다. 독불장군에게 어린 시절 ‘다리 밑에서 주워 온 놈’이라는 말은 곧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난 부모 없는 ‘호로자식’과 다름 없었다. 60년대, 그때 사회가 그랬다. 어린 맘의 상처는 날 자포자기로 몰고 갔다.

술·담배·싸움질이 시작됐다. 그게 편했다. 어차피 출세하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4학년 이후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6년을 그렇게 살았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던가. 방황은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첫사랑 아내를 만나면서 끝났다.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 공부를 했고 떳떳하기 위해 대학(원광대 원예과)에도 갔다. 대학교 3학년, 첫사랑은 아이를 낳았고 나는 결혼했다. 사랑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만큼 체득한 사람도 드물 거다.

졸업하면 당구장을 차릴 요량이었다. 일을 배우러 친구가 운영하는 당구장에 드나들면서 내 인생은 또 뒤엉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방황 DNA가 되살아났다. 내기 당구 돈맛을 못 이겨 자연스레 화투판에도 끼어들었다. 속칭 ‘도리짓고땡’. 밑천만 생기면 덤볐다. 판돈이 없을 땐 옆집 카센터로 달려갔다. 돈놀이를 하는 카센터 주인에게 땅문서를 넘겨주고 1000만원씩 두 번을 빌렸다.

40마지기(2만6400㎡·8000평) 논과 20마지기 밭은 2년도 안 돼 도박판에서 사라졌다. 화투를 잡으면 잡념이 사라졌다. 본전만 찾으면 그만두려 했지만 맘뿐이었다. 본전이 멀어지면서 이성도 사라졌다. 사나흘에 한 번씩 집에 들어가서는 아내를 구타하기 일쑤였다. 아내와 아들·딸은 나를 찾는 카드회사의 전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카드 빚과 사채는 이자가 늘어 1억9000만원에 달했다.

결혼 20주년이었던 1999년 정초. 신용불량자가 된 내게 아내는 말했다. “이혼하자.” 나는 영하의 거리로 나왔다. 마흔한 살이었다.

뼛속의 한기

시멘트 바닥은 몹시 찼다. 서울역 지하도 한편에 겨우 박스를 깔고 누워 신문을 덮었다. 아무리 깔고 덮어도 온몸이 시렸다. 한기가 뼈 속을 후비는 고통은 형언의 범주를 벗어난다는 걸 난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러나 더 지독한 고통이 있었다. ‘외로움’이었다. 어머니와 가족을 볼 수 없는 고통,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구걸해야 하는 ‘쪽 팔림’. 그걸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 했던가. 노숙인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건강을 해치고 나면 ‘노숙’의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주변엔 골골거리는 환자뿐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지갑을 잃어버렸어요, 돈 좀 빌려주세요.” 소리는 입술가에서 맴돌았다. 그래도 선한 사마리안 몇 분이 동전 몇 푼과 1000원짜리 지폐를 던졌다. 눈물이 한없이 솟아 얼굴을 덮었다. 귀하디 귀했던 독불장군의 인내는 여기까지였다.

구걸한 지 석 달쯤 되던 봄날, 틈틈이 사 모은 수면제 150알을 막걸리 한 사발과 함께 입에 털어 넣었다. 희미한 영상이 눈과 귀를 스쳤다. “빨리빨리 옮겨, 늦으면 위험해.” 귀에 익은 동료들의 목소리였다. 자살은 실패했다. 8시간 만에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아들에게 구걸하다

병원 측이 소개해준 노숙자 쉼터에서 김씨를 만난 건 악연 중 악연이었다. 그는 경마에 빠져 빌딩과 가정을 잃은 폐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와 통하는 게 많았다. 공공근로 일로 만원짜리 석 장을 받아 든 어느 날, 그를 따라 경마장을 찾았다. 재미로 산 마권 3만원은 현금 129만원이 돼 돌아왔다. “이거다.” 교차로에 섰다 출발하는 차들이 총소리를 듣고 뛰쳐나가는 경주마로 보였다.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들을 찾았다. 말밥을 주기 위해(마권을 사기 위해)서였다. 못난 아비를 둔 아들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려 그 고생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돈 좀 있냐.”

“가불하면 80만원 정도 받을 수 있어요.”

“내일 100만원으로 불려서 돌려주마.”

이튿날, 다시 빈손이 됐다. 나는 아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① 2009년 11월 성공회대 교정에서 서울시 희망의 인문학 2기 과정 수료식을 마친 후 학사모를 쓰고 기념촬영을 했다. ② 2009년 12월 31일 자정, 제야의 종 타종 인사로 참여한 안승갑씨. ③ 최근 서울시 중랑구 구세군자활주거복지센터 지하식당에서 안승갑씨가 ‘노숙자 청강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고 있다.
작가가 되다

노숙과 쉼터 생활을 반복하던 2006년 11월. 영등포역 대합실에 앉아 있는 내게 서울시립 비전 트레이닝센터 자원봉사자 한 분이 다가왔다. 성한 이가 없어 나눠주는 빵을 제대로 씹지 못하고 오물거리는 내게 그는 센터에 입소할 것을 권했다. 틀니를 맞춰준다고 했다.

처음엔 안 갈 생각이었다. 규제가 많고 이런저런 훈련이 많은 곳이라 노숙인 사이에선 기피 1순위였다. 그러나 음식을 씹지 못하는 고통은 너무 컸다. 틀니가 간절했다.

센터에서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으며 안정을 찾아가던 어느 날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들었다. 서울시가 노숙자들의 파산 면책 소송을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빚만 없다면 새 출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을 가다듬었다. 35년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는 술·담배를 끊었다. 스트레스 대처 프로그램, 자금관리 수업, 취업 준비 과정까지 2년여 동안 재활 프로그램을 빠지지 않았다. 2009년 2월 19일. 난 법원으로부터 ‘면·책·확·정’ 판정을 받았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희망의 인문학’ 과정에 참석하면서 나는 새로 태어났다. 글쓰기 수업은 흥미로웠다. 지하철을 돌며 잡상인을 할 때 사람들은 내게 “어쩜 그렇게 당가문(물건을 팔기 위한 선전문구)을 잘 만드느냐”고 했다. 글을 썼다. 주제는 ‘가족’. 사랑과 도박,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수업시간마다 한 줄, 두 줄 적어 내려갔다. 어느 날 내 글을 본 한 출판사에서 책을 낼 것을 제의해왔다. 『거리의 남자, 인문학을 말하다』는 내 삶의 참회록이다.

그해 추석, ‘저자 안승갑’이 된 나는 11년 만에 아들과 함께 할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낫을 든 채 쭈그려 앉은 여든두 살 등 굽은 노모, 팔을 걷어붙인 채 예초기를 돌리는 장성한 아들, 그 둘 사이에 앉아 나는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오르는 속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엉엉 울었다.

희망을 쏘다

며칠 전 서울시 중랑구 구세군자활주거복지센터 지하식당. 40여 명의 노숙자 앞에 하늘색 와이셔츠 차림의 안승갑씨가 서 있었다. 열다섯 번 째 강연 날이었다. 주제는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안씨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10만원짜리 수표를 꺼냈다. 그는 수표를 구겨서 버리더니 슬며시 다시 주워 들고 물었다.

“그래도 갖고 싶지 않습니까? 더러워진 수표라도 갖고 싶은 이유는 그 ‘가치’ 때문입니다. 구겨지고 버려져도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주옥 같은 그의 경험론은 계속된다.

“술·도박을 멀리 하세요. 빚이 있다면 구제받는 방법을 찾으세요. 건강한 몸으로 일을 시작하세요. 미래의 나를 생각하세요.”

40여 분의 열강이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수는 길고 길었다.

안씨는 현재 청소 일로 한 달에 97만원을 번다. 그중 20만원을 서울시가 운영하는 ‘희망플러스통장’에 넣는다. 3년 만기가 차면 납입액만큼 서울시가 보조금을 준다.

1500만원의 목돈이 생기는 것이다. 10만원은 청약저축통장에 넣고 있다.

요즘 안씨는 희망을 말한다. 가까이는 노숙인들에게 재활의 꿈을 심어주는 것이다. 멀리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내에게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의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글=박태희·최모란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내러티브 저널리즘(narrative journalism)
기존의 ‘단순 사실 전달식’ 기사 형태에서 벗어나 소설 문장처럼 ‘이야기하듯’ 구성하는 기사 형식. 주요 인물을 깊이 추적해 사건의 이면을 보여주고, 사실을 현장감 있게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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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