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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캐스팅의 원초적 본능’ 켈리 리

사람들은 그녀를 ‘캐스팅의 달인’(Casting Guru)이라 부른다. 18년간 드라마의 배역 발탁과 선정만 해 온 ‘선수 중의 선수’, 김윤진과 샌드라 오를 미국 TV의 프라임 타임에 꽂아줬던 장본인, 세계적 인기를 얻고 있는 ‘미드’ 속 배우들을 좌지우지하는 여자…. 미국 ABC TV 총괄 부사장으로 자사 모든 시리즈물의 캐스팅을 책임지는 켈리 리(Keli Lee·39)의 이야기다. 미국 방송가에서 가장 힘센 한국계로 자리 잡은 그를 LA 인근 버뱅크의 디즈니-ABC 텔레비전 그룹 사무실에서 만났다. 버뱅크는 할리우드 영화 스튜디오와 메이저 방송사가 몰려 있는 곳이다.

글=LA중앙일보 이경민 기자
사진=백종춘 기자

“현재 방영되는 모든 드라마, 시험 단계에 있는 모든 파일럿 드라마의 캐스팅을 책임지죠. 작품마다 캐스팅 디렉터를 고용합니다. 이들이 역할마다 5~8명의 배우를 고르면, 제작을 맡는 ABC 스튜디오에서 이 중 3명가량의 배우를 다시 고릅니다. 이후 실제 편성권을 가진 ABC 네트워크가 마지막 결정을 하는 방식으로 캐스팅이 이뤄지죠. 저는 이 과정 전체를 감독합니다.”

미국의 드라마 제작환경은 숨가쁘게 돌아간다. 파일럿 편성이 결정되면 길어야 6~8주, 짧으면 2주 내에 캐스팅을 완료한다. 매해 새 시즌을 준비하며 다양한 신작을 시험하는 1~4월 파일럿 시즌에는 수십 편의 작품을 한꺼번에 캐스팅할 경우도 있다. “덕분에 매년 5~6월이면 앓아 눕는 게 습관이 됐죠. 선정 업무가 없을 땐 리서치와 발견을 하고 다니는 게 주요 업무”라고 켈리는 말한다.

“현재 방송되는 모든 방송사의 모든 TV쇼는 물론 연극, 뮤지컬, 이름 없는 영화제의 단편 출품작까지 샅샅이 보고 다닙니다. 배우들을 리서치하는 거죠. 그저 ‘저런 배우가 있구나’ 보는 게 아닙니다. ‘저 배우가 뭘 더 할 수 있을까’를 보는 게 제 일이죠.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이죠. 진지한 역할만 했던 사람에게서 코믹한 재능을 발견하는 것, 혹은 그 반대의 경우야말로 저에겐 가장 큰 수확이자 기쁨입니다.”

“항상 여러 수준, 다양한 배우의 리스트를 가지고 다녀요. 하지만 아주 현실적인 리스트죠. 제가 줄리아 로버츠를 캐스팅하고 싶다고 한들 그녀가 TV에 나올 리는 없는 거잖아요.”

가장 만족스러웠던 캐스팅은 “모든 ABC TV 시리즈물의 캐스트들”이란다. ‘위기의 주부들(Desperate Housewives)’의 에바 롱고리아·테리 해처·펠리시티 허프먼과 ‘그레이 아나토미 ’의 캐서린 헤이글·저스틴 챔버스, ‘로스트(Lost)’의 매슈 폭스·조지 가르시아 등 모두가 매력적이고 공감 가는 캐스팅이라 애정이 듬뿍 간다는 얘기였다.

“캐스팅에서 ‘실패’란 말은 쓰고 싶지 않아요. 대단한 반응이 없었다 하더라도 단지 타이밍이 안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지 클루니도 옛날엔 수많은 파일럿을 전전했던 배우입니다. ABC의 인기 시리즈인 ‘모던 패밀리(Modern Family)’의 소피아 베가라도 네 번이나 파일럿 프로그램에서 테스트를 받은 뒤에야 자신에게 딱 맞는 역할을 찾았죠.”

켈리 리가 캐스팅의 세계에 입문한 계기는 순전히 우연이다.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미국으로 이민 온 그는 부모님의 살뜰한 뒷바라지와 교육열 속에서 자랐다. 우수한 성적과 다양한 클럽활동 경력을 지닌 전도유망한 학생으로 뉴욕대(NYU)에 입학한다. 변호사가 될 생각으로 철학을 전공한 18세의 켈리는 아르바이트로 뉴욕의 유명한 코미디 클럽에서 손님들 전화를 받거나 자리 안내를 돕는 종업원 일을 시작했다. 1990년의 일이다.

“당시 미국은 한창 코미디 붐이 일던 때였지요. 이만큼 멋진 아르바이트도 없겠다 싶어 열심히 일했죠. 그러다 친해진 한 코미디언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일해 볼래’ 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그러겠다고 했어요.”

그때 소개받은 사람이 2006년 작고한 전설적 캐스팅 디렉터 필리스 허프먼이었다. 당장 실무에 투입됐다. 첫 작품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 차후 아카데미상까지 받게 된 대작으로 업계에 입문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당시엔 뭘 하는지도 몰랐어요. 매일 방에 갇혀 산더미 같은 비디오만 봤거든요. 그때가 막 ‘죽은 시인의 사회’가 화제가 됐을 무렵인데, 눈앞에서 이단 호크가 왔다 갔다 하니 ‘오! 완전 멋진데’라며 이 일을 평생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이후론 승승장구였다. 94년 ABC 뉴욕 본부의 캐스팅 부디렉터로 임명된 데 이어 95년부터 LA 본사로 옮겨 계열사인 터치스톤과 월트디즈니TV의 캐스팅 디렉터로 승진했다. 99년엔 ABC TV 캐스팅 부사장으로 발탁됐고, 2003년 시니어 부사장과 2005년 총괄 부사장으로의 도약까지 그녀의 이력은 화려했다.

미국 엔터테인먼트 업계도 인정한 ‘캐스팅 본능(Casting Instinct)’을 바로 그녀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스트’ ‘그레이 아나토미’ ‘위기의 주부들’ ‘어글리 베티(Ugly Betty)’ 등 최근 그녀가 손을 댄 드라마들만 해도 모두 초대박이 났다. 특히 ABC 드라마들이 여성 시청자들의 압도적 인기를 모은 것은 켈리의 공이라는 게 업계의 평가다.

켈리 리의 또 다른 성과는 ABC 드라마에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을 불어 넣었다는 점이다. 그녀가 손을 댄 이후 ABC 드라마엔 아시아계·라틴계·유럽계 배우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김윤진, 대니얼 대 김, 존 조, 샌드라 오 등 한인 배우들이 주요 배역에 캐스팅된 것도 그녀 덕이다.

“그게 오늘날 미국의 모습이에요. 다양성은 미국 문화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다양한 인종, 문화권의 시청자들이 자신과 쉽게 동일시할 수 있는 배우들을 드라마 속에서 찾도록 하는 것은 시청률 면에서도 큰 도움이 되죠. 한국을 비롯한 세계 시장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한국 배우들의 미국 진출 가능성도 높아졌지만, 문제는 역시 ‘영어’라는 게 그녀의 지적이다.

“완벽한 ‘미국 영어’를 구사해야 해요. 이건 영국·호주 출신 배우들도 마찬가지예요. 억양이 이상한 배우가 비중 있는 역을 맡게 되면, 그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복잡해져요. 어디 출신이고 어떤 배경에서 저런 억양을 구사하는지 극에서 다 설명해 줘야 하거든요.”

모든 캐스팅을 결정하기 전 시청자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녀의 비법이었다. ‘나라면 이 사람을 계속 보고 싶을까?’라고.

“좋은 배우, 연기를 잘하는 배우는 많습니다. 하지만 배역과 맡지 않는다면 보는 사람의 기억에선 사라져 버리죠. 성공적인 캐스팅은 그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를 계속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겁니다. 시청자들이 ‘저 사람, 뭔가 나와 비슷한 점이 있다, 이해가 된다’라고 느끼게 해 줄 배우를 찾아내는 게 좋은 캐스팅이죠.” 영화와 비교해 TV엔 보다 친근감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고집이었다. ‘신비감’은 사절인 셈이다.

물론 배우의 책임감과 진정성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평가한다. “이 역할을 줘도 될 만한 믿을 만한 배우인가, 그리고 이 배우가 표현하는 감정에 진정성이 있는가.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이 뒷받침된다면 계속 기회를 줘 보는 편이에요.”

사실 켈리는 ‘노’(No) 속에서 산다. 많은 이에게 ‘노’를 말해야 하고 ‘노’를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쉽게 ‘노’를 말해도, 나는 그 ‘노’를 한 번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캐스팅 제의를 거절당하는 일은 수도 없이 많죠. 그래도 꼭 해야겠다 싶으면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대본이나 배역에 흥미를 못 느낀다면 PD나 작가·감독과의 미팅을 주선해 주거나, 이미 나와 있는 대본 그 다음의 이야기를 미리 들려준다든지, 궁금한 것은 뭐든지 물어보라고 해서 새로운 흥미나 이해를 만들어 냅니다.”

반대로 자신이 ‘노’를 해야 하는 순간엔 신중하다. “캐스팅은 도박입니다. 잠재력과 가능성에 대한 도박이죠. 항상 열려 있는 사고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이 보람된 이유는 누군가에게 꿈을 이룰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점이에요. 그러니 한 번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해서 미래가 없다고 단정짓는 일은 절대 해선 안 됩니다.”  

켈리의 사람 낚기 비법

1 아무도 안 볼 것 같은 작품까지 샅샅이 뒤져 사람 찾는 데 공들여야.
2 저 배우의 지금보다는 앞으로 뭘 더 할 수 있을지가 가장 중요하다.
3 연기 잘하는 배우야 많다. 하지만 배역의 캐릭터를 잘 소화할 사람이라야.
4 상대는 쉽게 ‘No’를 말하지만 난 한 번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5‘책임감’과 ‘진정성’ 있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판단하지 말고 계속 기회를 줘야.



j 칵테일 >> 냉정한 미국식 캐스팅

‘미드’의 캐스팅에 관한 한 절대적 권력을 지닌 켈리 리에게 작가나 대형 에이전시, 매니저들의 캐스팅 파워에 대해 물었다. 한국처럼 특A급 작가들의 배우 선택권이나 초대형 기획사의 ‘끼워팔기’ 캐스팅은 없는지 궁금해서다.

그녀는 “작가들의 의견은 최대한 존중한다. 하지만 ‘끼워팔기’ 캐스팅은 어림도 없다”고 설명한다.

“작가들이 쓰고 싶게 만들어 줘야 하니까요. 이 배우를 놓고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지, 캐릭터를 발전시킬 수 있는지 확인하고, 아니라면 아무리 좋은 배우라도 캐스팅을 재고해야죠. 하지만 에이전시나 대스타가 영향력을 발휘해 조연급을 밀어 넣는 식의 일은 불가능합니다. 캐스팅은 투자입니다. 투자자인 저희가 입증하지 않은 배우를 누가 함부로 데려올 수 있겠어요. 그 한 명 때문에 쇼 전체가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안 될 일이죠.”

>> 쉬리 보고 김윤진 발탁

‘로스트’에서의 김윤진(왼쪽)과 대니얼 대 김.
켈리 리는 김윤진(37·왼쪽 사진)을 2004년 ‘로스트(Lost)’에 캐스팅해 월드스타로 만들어준 장본인이다. 그녀가 처음 김윤진을 알게 된 것은 한 에이전트가 보여준 영화 ‘쉬리’를 통해서다. 김윤진의 인상 깊은 연기에 완전히 빠져든 그는 당장 김윤진을 만나 봐야겠다며 미팅을 서둘렀다.

당시만 해도 김윤진이 영어를 잘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직접 만난 김윤진이 빼어난 영어실력까지 가졌단 사실을 알자 켈리는 속으로 ‘됐다!’ 싶었다고 기억했다. 김윤진은 10세 때 미국으로 이민 와 보스턴대를 졸업했다. 하지만 당시엔 오히려 김윤진이 미국 진출에 대한 생각이 소극적이었다.

“ 한국에서의 활동을 아주 즐기고 있다고 거듭 말하더라고요. 미국 활동에 대해 뭔가 보장된 것도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죠.” 때마침 새로운 시리즈를 준비 중이던 ‘로스트’의 제작자 JJ 에이브럼스가 켈리에게 자문을 구해 왔다.

“새로운 시리즈를 구상 중인데 획기적인 ‘인터내셔널 캐스팅’이 필요하다며 좋은 배우 없느냐고 물어오더군요. 아무 말 없이 ‘쉬리’ DVD를 줬어요. 그 역시 바로 김윤진을 알아봤죠.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한 에이브럼스가 ‘선’의 캐릭터를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이에 맞춰 남편인 ‘진’의 캐릭터도 만들어지고 발전돼 대니얼 대 김까지 캐스팅된 거랍니다.”



칵테일 >> ‘켈리 리 사단’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밤 9시에 잠들면 나는 ‘위기의 주부들’을 봐요. 나야말로 위기의 주부죠.” 2005년 4월 미국의 백악관 출입기자단 만찬에서 나온 영부인 로라 부시의 고백이다. 당시 발언은 유머 작가가 써 준 대본으로 드러났지만 ‘위기의 주부들’이 어떤 위상을 지녔는지 생생히 보여준 일화였다. 2004년 10월 첫 전파를 탔던 이 드라마의 대박 흥행에서 개성파 여배우들의 등장과 호연(好演)을 빼놓을 수 없다. 켈리 리의 안목과 감(感)이 잘 묻어나는 작품이다.

가상의 마을인 이글주(州) 페어뷰의 위스테리아 레인. 아름답고 평온해 보이는 주택가에서 여성들의 비밀스럽고 수상한 삶이 펼쳐진다. 테리 해처는 이혼한 뒤 배관공과 사랑게임을 벌이는 좌충우돌형 수전 역을 감칠맛 나게 연기했다. 아메리칸 컨서버토리 극단에서 연기를 배운 그는 1990년대 중반, 수퍼맨 TV 시리즈인 ‘루이스와 클라크’에서 여주인공을 맡으며 얼굴을 널리 알렸다. 그러나 이후 부침을 겪으며 이혼으로 재산을 날리는 등 ‘위기의 배우’가 됐다. 그때 켈리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켈리는 ‘위기의 주부들’에서 비중 있는 역을 과감히 맡겼고, 해처는 2005년 골든 글로브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TV 시리즈 부문)을 거머쥐었다. 펠리시티 허프먼은 자녀 4명을 키우려고 광고회사 중역에서 전업주부로 변신한 리네트 역을 맡았다. 워킹맘 시청자들에게서 “내 얘기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역시 ‘위기의 주부들’을 발판 삼아 트랜스젠더의 얘기를 다룬 영화 ‘트랜스 아메리카’에 출연해 각종 상을 석권하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에바 롱고리아는 부자 남편을 만난 뒤 어린 정원사와 일탈을 꿈꾸는 철부지 전직 모델로 나왔다. 외모에 어울리는 배역이었고 가는 곳마다 파파라치가 붙는 ‘섹시 스타’로 떴다.

남자 배우들도 켈리의 손길을 거치면서 ‘별’로 바뀌었다. 한인 배우 대니얼 대 김은 뉴욕대 석사(연기)를 딴 뒤 드라마에 출연하다 ‘로스트’에서 김윤진의 남편(권진수)으로 낙점됐다. 2005년엔 미 피플지가 ‘살아 있는 가장 섹시한 남성’ 중 8위로 뽑으며 ‘왕(王) 복근’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2009년 영화 ‘스타 트렉: 더 비기닝’에 출연한 한인 존 조는 ‘플래스 포워드’에서 미 연방수사국(FBI) 특수요원으로 출연해 인기를 끌었다. 모두 ‘켈리 리 사단(師團)’으로 부를 만한 배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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