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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쥘 리메를 배반한 프랑스

유럽이 시끄럽다. 경제 위기 얘기가 아니다. 축구 탓이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여름 휴가철 뒤인 10월, 축구에 대한 ‘에타 제네로(Etats Generaux· 국민대토론회)’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이 토론회는 전쟁이나 조약 등 국가 대사(大事)와 관련한 주요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전문가와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을 듣는 제도로, 700년의 전통을 갖고 있다. 축구가 국민대토론회 주제로 올라가기는 처음이다. 그러자 야당은 “이건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코미디보다 더 웃기는 일”이라고 조롱했다.

프랑스 대표팀 감독과 축구협회장은 지난달 말 국회 청문회장에 불려 나왔다. 의원들은 선수가 감독에게 욕설을 하고, 감독이 선수를 퇴출시키는 등 내분과 조별 예선 탈락의 원인을 추궁했다. 레몽 도메네크 감독은 “신문이 갈등을 부추겼다”며 언론에 화살을 돌렸고, 장 피에르 에스칼레트 축구협회장은 “버릇없는 녀석들 때문”이라며 선수들을 비난했다. 앞서 프랑스의 한 저명한 철학자는 “프랑스가 아니라 자신의 종족을 대표하는 백만장자 건달들”이라고 선수들에게 인종차별적 비난을 퍼부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선수와 코칭 스태프 사이의 불화와 예선 탈락 경위를 규명하라고 체육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국가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남아공에서 돌아온 주전 공격수 티에리 앙리를 엘리제궁으로 불러 직접 면담하기도 했다.

월드컵으로 프랑스 사회의 갈등과 불화가 깊어지고 있다. 1930년 월드컵을 창시한 프랑스인 쥘 리메(1873∼1956·전 세계축구협회장)는 “축구를 통해 사람들은 서로를 신뢰하며 만날 수 있다. 가슴에 증오를 품거나 입으로 서로를 비난하지 않으면서…”라고 역설했다. 그 말이 무색해졌다.

16강전에서 독일에 4대1로 대패한 축구 종주국 영국도 정도는 덜하지만 사정은 비슷하다. 선수들은 아침 일찍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귀국했고, 이탈리아 출신인 파비오 카펠로 감독을 쫓아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독일 축구협회 부회장인 왕년의 골게터 프란츠 베켄바워는 “잉글랜드팀이 예전의 멍청한 축구로 되돌아갔다”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지난 대회를 포함해 4회 우승으로 유럽 국가 중 가장 뛰어난 월드컵 성적을 보였던 이탈리아도 조별 예선 탈락으로 선수와 감독이 죄인이 됐다. “선수들이 늙어서 뛰지 못한다” “감독이 친한 선수들만 기용했다”는 등 비난이 쏟아졌다. 한 장관은 “국민의 기를 꺾어 경제 성장률을 1%포인트 깎아먹었다”며 대표팀을 몰아세웠다.

공교롭게도 이번 월드컵에서 기대 이하의 저조한 성적을 보인 유럽국들은 모두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국민들의 심기가 편할 리 없다. 그렇다 해도 프랑스·영국·이탈리아 등 주요 8개국(G8)에 속한 선진국들에서 축구 때문에 독설과 비아냥이 난무하고 있는 것은 보기 민망하다. 그들의 유별난 축구 사랑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좀 지나친 것 같다. 실수를 한 선수들에게도 박수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한국인이 자랑스럽다.

이상언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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