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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혈전 벌일 때 일본 ‘금전’ 쌓였다

한국전쟁 중 일본은 군수물자 보급, 무기수리 등 미군의 병참기지였다. 1953년 7월 일본 기후현 가와사키 항공기 정비창에서 일본 기술자들이 미군기를 수리하고 있다.
월간중앙 "일본에 철강산업 같은 것은 필요 없겠지요. 기껏해야 연간 300만t 정도 있으면 되는데 이 정도는 미국에서 공급하면 되니까.”



도요타 회생, 소니·NHK 대도약 … 경제대국 기틀 갖춰
기획특집2 | 6·25로 36억 달러 횡재한 이웃나라

이 말을 들은 마쓰오 긴조(松尾金藏)를 포함한 당시 일본 상공성 관료들은 눈앞이 캄캄했다고 회고한다. 문제의 발언을 한 것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굴복시킨 연합국 총사령부, 즉 실제로는 맥아더 사령부였다.



항공모함과 전투기를 스스로 만들어 미국을 공격했던 철강 대국 일본에 더 이상 철강산업이 필요 없다는 말은 일본의 산업화를 영원히 막겠다는 미국의 의도였다. 이 말에 크게 놀라고 긴장했던 당시 젊은 관료 마쓰오는 후에 세계적 제철업체인 일본강관(NKK)의 회장을 역임했다. 그의 이러한 변신은 전후의 시점에는 상상도 못하던 기적이었다. 이러한 기적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미국의 적에서 파트너로



이 대답에 한국전쟁 덕분이라고 회고하는 기업인이 많다. 일본경제단체연합회(經團聯·게이단렌) 회장을 역임한 재계의 거물 사쿠라다 다케시(櫻田武)라는 사람은 전후 일본 경제 성장의 기반이 된 ‘세 개의 전쟁’으로 한국전쟁과 수에즈전쟁, 베트남전쟁을 꼽기도 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전쟁을 일으켜 망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전쟁으로 기사회생했다니 이 얼마나 커다란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그러면 이러한 아이러니는 어떻게 생긴 것인가? 이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외교정책에서 그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으로서 미국이 당초 노렸던 것은 일본의 영구적 ‘비군사화’였다.



군대와 경찰을 해산하고 영원히 전쟁을 못하게 하는 ‘평화헌법’이 부과된 것이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그러나 야심을 가지게 된 젊은 초강대국 미국은 공산주의를 상대로 세계적 규모의 냉전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1946년 3월 영국의 처칠 수상이 세계에 드리워진 ‘철의 커튼’을 언급하고 1947년에 들어서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반공 연설과 마셜플랜 발표가 이어졌다.



미국의 입장에서 태평양 건너에 버티고 있는 소련과 중공을 막을 수 있는 체크포인트는 일본이었다. 이로써 일본을 패망시킨 초강대국 미국이 드라이브를 건 냉전체제에서 일본은 미국의 지역파트너로서 일약 자리를 바꾼 것이다. 미국은 이 새 파트너가 천천히 민간경제를 중심으로 경제민주화를 달성하기를 원했다.



1948년 미 군정과 일본 정부가 합의한 ‘경제안정 9원칙’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일본 경제를 재생시키기 위한 임시적인 헌법과 같은 존재였다. 그 내용을 보면 재정수지의 균형화, 징세의 강화, 엄중한 융자 규제, 임금 안정화, 물가통제계획 강화, 외환관리 강화, 수출 증대를 위한 할당 및 배급 강화, 국산 원료 및 공업제품의 생산 증대, 식량공급계획의 능률 확대였다.



이는 당시 맥아더 사령부를 채우고 있던 뉴딜주의자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정책으로 일시적으로 관(官)이 주도해 경제를 안정시킨다는 것이었다. 재벌 위주의 전전(戰前) 경제체제에서 탈피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겠다는 방침이 중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경제안정 9원칙이 발표되고 수 개월 후인 1949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은 당시 디트로이트은행 총재를 맡고 있던 조셉 닷지라는 사람을 재정고문으로 파견한다. 도쿄(東京)에 발을 디딘 닷지의 입에서 나온 말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일본 경제는 지금 다케우마(竹馬:막대기에 발걸이를 붙인 놀이기구)를 타고 하늘에 떠 있는 겁니다. 내려앉지 않으면 안 돼요.”



패망한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미국 정부가 보낸 재정고문의 이 한마디에 전후 일본에 심각한 디플레이션이 찾아왔다. 이 디트로이트 출신의 은행가가 주도하는 ‘경제안정본부’는 과거 한국의 군사정권의 경제기획원에 못지않은 권력을 휘두르며 방만했던 정부부문을 줄이고 민간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했다.



균형예산의 운용, 정부보조금 철폐, 부흥금융금고 대출 전면정지 등의 조치에 이어 엔화의 달러에 대한 환율은 360엔으로 고정시켰다. 소위 ‘닷지라인’의 설정이었다.



조선에서 불어온 ‘신의 바람’



아마 닷지라인에 걸려 있던 1949년이 전후 일본인에게는 가장 힘든 해로 기억될 것이다. 정부가 소유하던 철도, 즉 국철에서 1·2차에 걸쳐 10만 명에 가까운 인원을 해고하는 계획이 발표되었고, 교원 중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을 숙청하는 ‘레드 퍼지(Red Purge)’가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1945년과 1950년 3월 사이에 일본에서는 1100개의 회사가 도산하고 50만 명 이상의 근로자가 직장을 잃었다. 필로폰으로 인한 마약 중독이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한 것도 이 해 10월이었다.



1945년 태평양전쟁 말기, 스스로 시작한 전쟁에서 이대로 지고 말 수 없다는 결의에 찬 일본군 조종사들은 폭탄을 실은 전투기로 미군 함정에 돌진했다. 이름하여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1200년대 원나라의 대군이 일본으로 몰려오는 위기에서 그들을 휩쓸어 일본을 구해준 신의 바람. 이 신기한 역사의 바람이 일본 열도를 또다시 휩쓴 것은 1950년 6월이었다.



한국전쟁, 즉 일본어로 ‘조선동란(朝鮮動亂)’이었다. 이러한 관찰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 도요타자동차를 보면 알 수 있다. 방직기 회사에서 시작한 도요타(豊田)가 자동차회사로 탈바꿈한 것은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1937년. GM과 포드가 미국에 산업시대의 도래를 알렸듯 도요타는 전쟁 중인 일본에 승용차를 내놓으며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 완패하고 거리에 걸식자가 떠돌아다니던 1945년 이후 도요타는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도요타자동차의 창시자 도요타 기이치로(豊田喜一郞)도 노조와 갈등 속에서 사장 자리를 내놓았다. 이웃나라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3개월 전이었다. 2억 엔의 자금이 모자라 도산하기 일보직전의 도요타를 구한 ‘신풍’이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이라는 바람 속에서 회생한 도요타는 세계의 기업이 되었다. 특히 ‘도요타 생산방식’이라는 일종의 산업표준을 만들어냈다. 한국전쟁에 따른 ‘특수경기’ 효과를 수치로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950~1952년 3년간의 직접적인 효과가 10억 달러, 1955년까지 호황기의 전체 효과가 36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엄청난 금액이다. 1950년 일본 정부의 예산은 약 6300억 엔으로 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18억 달러가 안 된다.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5년간의 호황기에 누린 특수경기가 2년간의 정부 예산과 맞먹은 셈이다.



이로부터 10년이 훨씬 지난 1965년 한국과 일본이 관계를 정상화한 조약(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할 당시 일제가 한국을 지배한 것에 대한 ‘무상보상액’이 3억 달러였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감이 잡힐 것이다. 한국전쟁에 따른 5년간의 특수경기효과가 36년 지배에 대한 보상금의 12배였던 것이다.



1950년 3월 당시 광공업 생산은 전년도 대비 6%포인트 증가했으나 1년 후인 1951년 3월에는 전년도 대비 46%포인트로 팽창했다. 이러한 호경기에 힘입어 도매물가는 1951년 3월에 전년도 대비 47%포인트 증가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몰고 온 소위 ‘조선특수(朝鮮特需)’는 무기 및 병기 생산과 수리, 석탄 생산, 자동차 수리, 마직 및 면직 등의 섬유업에 집중됐다.



한마디로 중공업·제조업의 부활이었다. 경제활동 내용을 보면 건설·하역(물류)·자동차 수리·전신 및 전화·기계 수리 등이 상위를 차지했다. <표1 참조> 일본인이 ‘전후시대’라고 생각하는 1945년부터 10년간 일어난 일은 패망에서의 기사회생이었고, 그 원동력이 한국전쟁이었던 것이다.



이를 경제지표로 보면 일목요연해진다. 석탄 생산의 경우, 1945~1955년 10년 동안 42% 증가했으며 제강(製鋼)에서는 8년간 450% 폭증했다. 그리고 무역 및 해외이전수지를 보면 9년간 대외수지가 76% 증가했다. <표2 참조>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수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의 재벌 해체와 중공업의 제한을 노렸던 미국 정부의 방침이 바뀌고 일본이 중화학공업의 길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태평양전쟁 직전 중화학공업은 일본 경제에서 60% 가까이를 점하고 있었다. 이를 이끈 것은 미쓰비시(三菱)·스미토모(住友)·미쓰이(三井)·닛산(日産) 등 재벌이었다.



노다니엘 월간중앙 객원편집위원·정치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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