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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 북침설 믿게 놔둔 우리 기성 세대 반성해야”

인요한 소장은 “한국민들에게 ‘정부를 좀 믿으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김태성 기자
6·25전쟁 발발 60년을 며칠 앞둔 지난 21일 서울 용산전쟁기념관. 해외참전 용사들의 후손 지원 프로젝트인 한국전쟁기념재단(이사장 백선엽 예비역 대장) 창립식이 끝난 뒤였다. 조영길 전 국방장관(재단 고문)이 인요한(51·미국명 존 린튼) 연세대 신촌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소장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한국말을 잘하십니까. 놀랐습니다.” 1m90㎝의 거구, 푸른 눈의 금발 신사가 유창한 한국말로 한 인사말이 퍽 인상적이었던 듯했다. “조 장군님.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근데 장군님 고향이 어디세요?” “전남 영광입니다.” 인 교수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이고, 저는 순천입니다. 어쩐지 우리 고향 말씨라고 생각했습니다. 반갑습니다.”

한국전쟁 기념재단 이사 맡은 인요한 연세대 국제진료소장

순천서 태어나 순천서 자란 미국 사람
인요한 교수는 구한말인 1895년 호남지역 최초의 선교사로 발을 디딘 미국인 유진 벨(1868~1925)의 4대손이다. 인 교수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린튼(1891~1960·대전 한남대 설립자)이 벨의 사위가 되면서 벨-린튼 가문은 4대에 걸쳐 115년째 한국 땅에서 교육과 선교,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항일 운동에도 나섰다. 1995년 후손들은 벨의 한국 선교 100년을 맞아 ‘유진벨 재단’을 설립했다. 인 교수의 형인 인세반 이사장과 인 교수는 북한 주민들의 결핵 퇴치 등 의료 지원을 위해 20여 차례나 방북했다. 선대의 한국 사랑이 북한으로 확대된 것이다. 신촌세브란스 병원 진료실엔 인 교수가 개구쟁이던 시절 땟국물 가득한 얼굴로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있다. “내 친구들입니다. 지금도 만나죠. 항상 편안한 친구죠.” 인 교수는 ‘고향 순천’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친한 사람들한테는 구수한 호남 사투리로 말한다.

인 교수에게 6·25전쟁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아버지 휴 린튼(한국명 인휴·1926~84)과 외삼촌(81·제프 플라워스)이 장교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그는 “자유의 소중함,
그리고 아버지가 전후 한국인의 삶에서 찾아낸 희망의 메시지가 떠오른다”고 했다.

인 교수의 아버지 고 휴 린튼 목사의 군인 시절 사진(오른쪽). 위는 린튼 목사가 인천상륙작전 때 탔던 구축함 히그비호.
-아버지는 어떻게 참전하셨는지.
“한국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미국에서 해군 장교로 활동하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때 참전했습니다. 전쟁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으셨지만 ‘민주주의와 자유는 피와 땀, 생명을 바쳐서 얻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아이구, 우리 아버지 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하시네. 귀찮아 죽겄네’라고 속으로 생각했죠.”

인휴 목사는 전쟁이 끝난 뒤 54년 한국에서 예편했다. 곧바로 선교와 교육 활동으로 선대의 뜻을 이은 것이다. “아버지는 농촌 선교를 하면서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전라도 땅은 몹시 궁핍했는데, 아무리 어려워도 이쪽 논 주인이 옆 논의 곡식을 넘보지 않더라는 겁니다. ‘이 나라 국민들의 마음엔 5000년 역사를 흐르는 도덕이 있다’고 하셨죠.”

6·25 뒤 선친이 유산 1만 달러 한국 투자
그런 믿음으로 인휴 목사는 1962년 윌리엄 린튼이 남긴 유산 1만 달러를 미국인 친구 칼 밀러(민병갈·최초의 귀화 미국인)에게 맡기고 한국에 투자하도록 했다. 당시 한국에 투자하는 외국 자본은 찾기 어려웠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성경 말씀 그대로죠. 한국의 미래를 믿은 겁니다. 미국의 작은 교회를 찾아 다니며 한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할 때도 ‘한국은 희망이 있는 나라다. 도덕이 살아있고, 근면하다. 미신만 털어버리면 된다’고 호소했습니다.”

인 교수의 아버지는 84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평생 검정 고무신을 신고 살았다고 한다.

“돌아가신 날도 검정 고무신을 신으셨어요. 그땐 검정 고무신이 창피했습니다. 연세대 의대에 입학하러 가는 날, 순천역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나온 아버지가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은 그 모습이 정말 자랑스럽죠.” 인 교수는 아버지의 장례식 날 미국인 친구분이 “자네 아버지는 한국인처럼 살았고, 한국 사람처럼 죽었네”라고 한 말이 두고 두고 가슴에 남는다고 했다. 인휴 목사는 교통사고 후 큰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숨졌다. 순천에 응급차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 교수는 93년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 순천 소방서에 기증하고 응급 시스템을 갖췄다. 순천에서 30년간 결핵요양소를 운영하며 결핵퇴치운동을 해온 어머니 루이스 린튼(83·인애자)은 96년 호암상(문화봉사대상) 수상 때 받은 상금 5000만원을 모두 들여 북한에 응급차를 지원하기도 했다.

“어릴 땐 검정 고무신만 신는 아버지 창피”
미 2사단 탱크 부대 소령으로 참전한 인 교수의 외삼촌은 한국전 얘기를 많이 들려줬다. 인 교수는 “민감한 얘기를 하나 해야겠다”며 해외 참전 용사들이 흘린 피를 생각하자는 뜻이라고 했다. 외삼촌으로부터 들은 장진호 전투 얘기였다. “인산인해로 밀려드는 중공군과 밤새 처절하게 싸운 다음 날, 동이 트는데 외삼촌 주위의 부하들이 많이 보이지 않더랍니다. 둘러 보니, 움푹 파인 땅에 병사들이 머리를 박고 있었고 다들 얼이 빠져 있었답니다. 정신을 차리라고 뺨을 때리고, 찬찬히 얼굴을 봤대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답니다. 15살, 16살. 삼촌이 울부짖듯 소리쳤대요. ‘These are boys! not men!’(얘들은 아이들이잖아). 2차대전 후 궁핍하던 시절,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니려고 나이를 속여 입대한 거죠. ‘이 전쟁의 명분을 나도 모르겠다. 묻지 말라. 내 의무는 자네들을 엄마 품에 다시 안겨줄 의무 그거 하나밖에 없다. 총을 들고 싸워라. 죽지 말고 살아남아라’고 했답니다. 한국땅에서 숨진 4만5000명의 해외 용사 가운데는 이런 소년병들도 많았던 겁니다.”

-한국에선 6·25 북침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북한도 북침이라고 하죠. 제가 평양 가서 이북 사람들 앉혀놓고 얘기했어요. ‘동무들, 준비를 많이 한 남한의 침공을 당한 북한이 돌아서서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한다. 난 상식적으로 못 믿겄어. 물리적으로 가능한지 근거 대보라’고 하면 그 사람들 그냥 조용해집니다. 남한 사회에서 북침론이 확산된 것은 지난 10년 기성 세대가 교육을 잘못한 것이고 반성해야 할 일이죠·”

인 교수는 최근 한국 사회가 잊어선 안 될 일을 잊고 있다고 했다.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럽죠. 4대 강이나 세종시를 두고 다툰다고 국가 정체성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근데 전쟁에 대한 올바른 역사 인식, 전쟁 중의 희생을 바탕으로 일궈낸 소중한 자유를 잊어선 안 되는 겁니다. 백선엽 장군 같은 분들과 수많은 장병들, 16개 해외 참전 용사들이 흘린 피 위에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는 덧붙여 “가장 안타까운 것은 한국인들이 60년 동안 해낸 그 소중한 성과를 온 세계인들이 존경하는데 정작 한국인들은 이를 과소 평가하고 자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천안함 조사를 믿지 못하겠다는 의견은 어떻게 보시는지.
“천안함 외국인 조사단 중 한 명이 축농증에 걸려서 저를 찾아왔어요. 제가 말했죠. ‘1%가 아니라고 한다면 북한이 저지른 일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101% 확실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 사람 말이 ‘110%다. 절대 사고가 아니고, 북한의 어뢰다’라고 했어요. 내 진료실에서 오간 얘기를 나는 믿고 싶습니다. 한국인들이 정부와 여당을 믿지 않는 것은 이해합니다. 일제 시대, 독재 정권 때 워낙 많이 속아본 긴 역사 때문이죠. 그러나 지금은 투표를 통해 내가 만든 여당입니다. 정부를 좀 믿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경부선을 보십시오. 그때 야당이 다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지나놓고 평가해야 맞죠.”

-귀화하지 않은 이유는 있는지요.
“어머니의 생각 등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지금은 귀화 안 하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을 인도적으로 돕기로 나섰을 때, 미국 국적이 훨씬 자유로웠습니다. 또 의료 관광 유치 등 제가 한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는데, 한국인으로서 얘기하는 것보다 미국인 자격으로 얘기하는 게 훨씬 효과적입니다. 다행히 내년 1월 복수국적이 허용되는데, 어머니의 의견을 들어 신청할 계획입니다.” 선친 얘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 인 교수는 “나도 주민등록증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말할 때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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