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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판문점의 공산주의자들 (116) 전승국 행세한 북한

회담은 처음부터 저들이 노린 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회담장 주변은 적군에 둘러싸인 모양새였다. 안내와 경비 모두 저들이 맡았다. 우리는 그저 적진에 고립된 느낌을 받아야 했다. 당시 회담장이던 개성의 내봉장을 중심으로 반경 4㎞는 적의 관리 아래에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저들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회담에 참석한 대표들과 진행을 위한 실무자들은 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의자를 더 높여 배치하고 깃발도 크게 만든 것은 스스로 전쟁에서 이긴 전승국(戰勝國) 행세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예는 또 있었다. 저들은 우리가 헬기 편으로 평화촌에서 회담장 주변에 도착했을 때 미군 지프 두 대를 끌고 나를 포함한 연합군 측 대표단을 태웠다. 전쟁 통에 아군으로부터 노획한 차량이었다. 지프 앞에는 흰색 깃발이 꽂혀 있었다. 마치 우리가 항복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다. 조잡하면서도 괜히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심리전의 연속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들은 유엔 측 보도진의 출입을 막았다. 서방 세계에서 보도진이 참여하지 못하는 회담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저들은 기자들의 발길을 돌려세웠다. 당시 한국 기자를 포함해 유엔 쪽에서 취재에 참여한 기자들은 줄잡아 100명이 넘었다.

적 치하의 개성에서 열렸던 1951년 7월의 휴전회담에선 공산 측의 여러 가지 심리전이 횡행했다. 공산 측은 유엔 측 인원을 아군으로부터 노획한 미군 지프와 트럭에 태웠다. 차앞에는 항복을 의미하는 흰색 깃발을 달아 자신들이 승리한 척했다. 북한군 병사(오른쪽)가 선전 영화 제작을 위해 유엔군 병사를 촬영하고 있다. [미 육군부 자료]
회담이 시작되면서 당장 이들이 취재할 수 없게 되자 상황이 시끄러워졌다. 이들은 문산에 마련된 열차의 식당 칸에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숙박시설을 별도로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외신 기자 100여 명은 유엔군 총사령관인 매슈 리지웨이에게 매일 강력하게 항의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우리 대표진에 “어떻게 해서든지 이 문제를 풀어라”고 강조했지만 소용없었다. 취재진의 숫자에서도 공산 측은 서방 측 기자 숫자와 비교해 턱없이 모자랐다. 서방 측 기자들에게 취재를 허용하는 문제를 결론 내지 못해 7월 12일부터 사흘 동안 회담이 아예 열리지 못했다.

회담 전 대한민국의 공식 입장이 발표된 적이 있다. 당시 변영태 외무장관이 휴전회담에 대해 발표한 5개 조항이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1. 중공은 한반도로부터 완전히 철수하되 북한 비전투원의 생명과 재산에 손상을 가해서는 안 된다.

2. 북한군도 무장해제해야 한다.

3. 유엔은 제3국들이 북한 공산당에 군사적, 재정적 또는 기타의 형식으로 원조하지 못하도록 방지함에 동의해야 한다.

4. 대한민국의 정식 대표는 한국 문제의 전부 또는 일부를 토의하거나 고려하는 어떠한 국제회의 또는 회합에도 참가해야 한다.

5. 한국의 주권이나 영토를 침범하는 안이나 행동은 어떤 것이라도 효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공산 측이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휴전 회담에 반대한다는 강력한 뜻이 담겨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게다가 회담이 열린 뒤 격려차 찾아온 이기붕 국방장관은 “중공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휴전을 해야지 현 상태로는 반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휴전회담 참석을 위해 찾아갔던 이승만 대통령이나, 이기붕 장관의 발언, 나아가 정부 공식 입장으로 변영태 장관이 발표한 내용 모두 휴전 회담에 참석한 내 입장을 어렵고도 모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회담에 임하는 내 신분과 입장에 문제가 생겨날 가능성이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유엔의 구두 명령에 의해서만 회담에 참석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은 내게 분명히 “휴전 회담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던 상황이었다. 그런 문제가 계속 마음에 쓰였다. 나는 첫날 열린 회담이 끝난 뒤 평화촌 숙소에 돌아와 터너 조이 제독과 면담했다. 나는 “정식으로 신임장이 있어야 좋을 것 같다”며 “대한민국 정부는 이 휴전 회담을 반대하고 있는데, 사실상 내가 이 회담에 참석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내 말을 듣고 난 조이 제독은 “나도 사실 그 문제를 생각했다”며 “신임장이 없으면 대외적으로도 큰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으니 리지웨이 장군에게 말해 처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 며칠 뒤 이기붕 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찾아왔다. ‘나는 휴전을 원치 않으나 유엔 측에 협력해 회담에 계속 참석하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 지어졌다.

이는 사실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에 논의가 필요한 사항이었다. 이면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사항을 휴전 회담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내가 회담에 참석하는 게 바람직했던 것이다. 그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내게 친서를 보냈다는 것은 한국과 미국 사이에 모종의 협의가 이뤄졌다는 점을 시사했다. 어쨌든 나는 상황에 따라 대한민국의 입장을 반영할 수 있도록 스스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루하게 회담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가능한 한 대한민국의 입장이 최대한 반영되도록 계속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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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