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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판문점의 공산주의자들 (114) 필설(筆舌)의 전쟁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이 돌아간 다음 날이었다.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곧 휴전회담이 열릴 예정인데, 한국 대표로 백 장군을 선정했다”는 통보였다. 이 총장은 이어서 “유엔군 측 요청으로 당신을 뽑은 것이니까 당장 부산으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께 보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유엔군 요청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밴플리트 장군이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국군 1군단 사령부로 나를 찾아와 해수욕을 즐기다가 느닷없이 “당신 중국말 할 줄 아느냐”고 물었던 밴플리트 장군이었다. 그는 중공군 대표가 참석하는 휴전회담이므로 아군 측에서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총장은 휴전회담으로 내가 나가 있는 동안 국군 1군단 지휘는 부군단장인 장창국 준장에게 맡기라는 지시도 했다. 나는 ‘휴전회담을 시작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은 서둘렀다. 간단한 준비를 마친 뒤 나는 1951년 7월 8일 부산으로 날아갔다. 임시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대통령은 아주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최근 발행된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서울셀렉션)에 실린 1951년 7월 휴전회담 시작 당시의 모습이다. 유엔 측 대표로 참석한 백선엽 장군, 이수영 통역장교, 알레이 버크 제독, 행크 호디스 소장(오른쪽부터)이 회담장인 내봉장 옆에 마련된 장소에서 잠시 쉬고 있다.
“중공군 100만 명 이상이 들어와 있는 마당에 무슨 휴전협상이라는 말인가. 우리는 통일을 해야 해. 지금 휴전한다면 우리 스스로 국토를 분단하는 것이야. 나는 절대 반대다.”

실제 이승만 대통령은 협정이 이뤄진 53년까지 줄기차게 공산군과의 휴전을 반대했다. 이 대통령의 주장은 ‘북진통일(北進統一)’이었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이 대통령은 그 주장을 절대 꺾지 않아 미군과 워싱턴의 미 행정부와 자주 심각한 갈등 관계에 놓였다.

국군 1군단장으로 전선을 지키다가 갑자기 휴전회담 대표로 뽑힌 내 처지가 난감했다. 명령에 따라 휴전회담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 본인은 강력하게 그 회담을 반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을 꺼냈다. “저는 대한민국 군인입니다. 참모총장께서 휴전회담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내려 이렇게 나섰지만, 대통령 각하의 뜻이 그렇다면 제가 회담에 나서는 것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미국 사람들이 저렇게 휴전회담을 서두르고 있으니 가지 않을 수는 없다. 미국 사람들과 협조한다는 의미도 있으니 참석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다른 말은 없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밖으로 나왔다.

나는 육군본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이종찬 참모총장 방에 들러 간단히 보고를 마쳤다. 총장은 “이수영 대령(전 주프랑스 대사)이 연락장교로서 당신을 보좌할 것”이라고 말해줬다. 총장과 헤어져 나는 곧장 문산으로 향했다.

문산. 전쟁이 발발하면서 내가 북한군과 처음 싸움을 벌였던 국군 1사단 방어지역이었다. 아울러 북진 때 이곳을 지났고, 중공군에 밀려 내려올 때도 방어선을 펼쳤던 곳이다. 격렬한 전쟁을 벌였던 이 문산으로 와서 적들과 휴전협상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접어드니 마음이 착잡했다.

회담장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협상을 벌어야 한다는 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내가 경험한 바로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상대방의 틈만을 노리고, 허점을 잡았다고 생각하면 바로 그곳을 치고 들어오는 집요한 심리전의 명수들이었다. 총을 놔두고 필설(筆舌)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는 또 다른 전쟁, 그것은 길고 지루하면서 험난한 과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대한민국 정부나 유엔군이 정식으로 전해준 임명장이 없었다. 그저 유엔군 측의 통보에 따라 육군참모총장이 구두로만 임명한 상태였다. 모두 전시(戰時)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문산 동쪽 개울가에 사과밭이 있었고, 휴전회담 관련 요원들이 묵을 천막이 그곳에 세워져 있었다. 이름이 ‘평화촌(Peace camp)’이었다. 유엔 측 회담 대표는 미 극동해군 사령관 터너 조이 중장이 수석이었다. 그 밑에 미 8군 참모부장 행크 호디스 소장, 미 극동공군 부사령관 로런스 크레이기 소장이 있었다. “도쿄를 다녀와야 한다”면서 엊그제 강릉에서 내게 작별 인사를 했던 알레이 버크 소장도 극동해군 참모부장 자격으로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에 와 있었다. 버크는 나를 보더니 멋쩍은 듯이 씩 웃기만 했다.

휴전회담은 그해 6월 23일 소련의 유엔 대표가 처음 제의했고, 일주일 뒤인 6월 30일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이 원산항에 정박 중인 덴마크의 병원선 유틀란디아 선상에서 회담을 열자고 장소를 제안해 이뤄지게 됐다.

그러나 중국이 7월 1일 베이징 방송을 통해 회담 장소를 개성으로 하자고 수정 제의함에 따라 최종적으로 개성에서 열기로 정해졌다. 유엔군 측은 “열흘쯤 지나면 협상이 타결될 수도 있다”며 낙관하는 분위기였다. 군인끼리 하는 회담이라 간단히 결말이 날 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만나는 유엔 측 사람들에게 “회담이 결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했지만 그런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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