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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덜레스 미 국무부 고문 방한 … 귀국 3일 후 북한군 전면

 
  1950년 6월 한국으로 떠나는 덜레스 미 국무부 고문(왼쪽에서 둘째) 부부를 환송하는 장면 주미대사(맨 오른쪽). 그때 장면은 “방한 즉시로 38선에 몸소 가볼 것과, 새로 열리는 국회 개원식에 참석하여 유사시에는 미국이 한국을 즉각 지원하겠다는 언약을 해 줄 것”을 거듭 부탁했다고 한다. [사진=장면기념사업회 제공]
 
6·25전쟁이 터지기 한 해 전 1949년 6월 미군은 군사고문단 500명만을 남기고 이 땅을 떠났다. 한 달 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철수에 따른 안보 대책으로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같은 집단방위체제인 ‘태평양동맹’을 결성해 주든지, 한·미 두 나라가 상호방위협정을 맺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공산주의 침략에 대한 한국 방위를 공개적으로 서약하든지 셋 중 하나를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묵묵부답이었다. 1947년 미국의 세계전략이 봉쇄정책으로 바뀌면서 한반도 정책도 소련 세력의 확장을 막는 현상 유지에 주안점이 두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이나 김구와 김규식이 주도한 남북협상에 의한 평화통일론, 그리고 남로당과 북한에 의한 체제 전복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 기도 등, 6·25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미국은 한반도에서 38선을 경계로 한 분단이란 현상을 깨뜨릴지 모를 모든 행위나 시도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했다. 미국이 한국을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한 것으로 알려진 50년 1월 12일 애치슨 국무장관의 연설도 “우선은 공격받은 국민들이 침략에 저항해야 하지만, 그 다음에는 유엔헌장 아래에서 전체 문명세계가 개입할 것임”을 천명한 것을 볼 때 한국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현상을 유지하겠다는 것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애치슨의 뒤를 이어 주한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북진통일을 말하는 이승만에게 북한을 공격하는 경우 모든 지원을 끊겠다는 경고 메시지를 발했으며, 1월 19일 미 하원도 9000만 달러의 대한(對韓) 원조지출안을 부결시켰다. 또한 미국은 군사고문단을 통해 남로당의 무장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 개입했다. 그때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기조는 현상유지에 있었다.

“여러분들은 홀로 있지 않다. 여러분들이 인간의 자유라는 위대한 설계 속에서 여러분의 역할을 가치 있게 계속 수행하고 있는 한 여러분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6월 19일 제2대 국회 개원식장에서 미 국무부 고문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유사시 미국의 군사개입을 재천명하는 연설을 했다. 한국으로 떠나는 그에게 국회연설을 부탁하자 “전쟁이 금방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처럼 서두르느냐?”라고 답했다는 장면의 회고가 잘 말해주듯 그때 미국은 전쟁이 일어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한(離韓)한 지 3일 만에 북한은 남침을 개시했다. 38선을 휴전선으로 대체하고 끝난 6·25전쟁이 주는 교훈은 그때나 지금이나 열강의 이해가 엇갈리는 이 땅의 지정학적 위치상 열강 누구도 남북 분단이란 현상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6·25전쟁 60주년을 맞는 지금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을지 못내 궁금하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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