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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110) 미군과의 소통과 우정

미 해군 순양함 로스앤젤레스함으로 알레이 버크 제독(왼쪽)을 방문한 백선엽 당시 국군 1군단장이 인사를 나누는 장면. [백선엽 제공]
알레이 버크 제독은 엘리트 해군으로 나중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밑에서 해군참모총장에 올라 6년 동안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한국 전선에 뛰어든 미군 지휘관이 대개 그렇듯이 그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영웅적으로 임무를 수행했으며, 군인으로서 매우 빼어난 자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 미군 지휘관과의 교유는 내가 부대를 이끄는 데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됐다.



버크도 나도 ★★ … 최전선 참호 함께 뒹굴며 신뢰 쌓아갔다

버크 제독은 1951년 7월 시작된 휴전회담의 대표로 나와 함께 참석했고, 나중에 내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군사력 강화를 위한 결정적인 충고를 해줬다. 그만큼 그는 군문(軍門)에 있던 내게 매우 소중한 인물이었다. 나를 찾아온 그와 함께 전선을 둘러본 것도 중요했다. 그는 일선 시찰을 고집했다. 나는 그와 함께 수도사단의 최전선 진지로 나갔다.



나는 그 상황을 잘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버크 제독은 그의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우리 일행은 신속히 매복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참호가 있었다. 밤새 수많은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다”고 적었다.



나는 당시 버크 제독이 야간의 전선을 경험하기 위해 열심히 이곳저곳을 누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현장 경험을 중시했고, 그 값비싼 함포 포탄을 나의 국군 1군단에 지원하기 위해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면밀하게 체크하는 눈치였다. 이런 적도 있었다.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우리 국군 1군단을 방문했을 때였다. 나는 버크 제독에게 연락을 해서 “밴플리트 사령관과 만나는 자리에 함께 참석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버크 제독이 곧 도착했다. 그리고 회의가 열렸다. 밴플리트 사령관에게 전황보고를 마친 뒤 나는 얼른 버크 제독에게 차례를 넘겼다.



6·25전쟁 당시 동해안 국군 1군단을 지원했던 미 7함대 소속 전함 뉴저지함의 앞모습이다. 길이 271m에 29문의 함포를 장착하고 최고 33노트(시속 61㎞)로 달릴 수 있는 거대 전함이다. 기준 배수량은 4만5000t에 승조원은 1921명이다. [미 육군부 자료]
버크 제독은 그 대목을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보고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백 장군이 갑자기 나를 지명하며 ‘다음은 본관의 포병사령관인 알레이 버크 제독이 설명하겠다’고 발언했다. 사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었지만 나는 하는 수 없이 주섬주섬 브리핑을 해야 했다.”



회고록은 다소 유머스럽게 그가 내 ‘꾀’에 당한 셈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나이가 자신보다 훨씬 적은 내게 당하는 척하면서 얼른 그 상황을 수습해주는 버크 제독의 여유와 관대함을 읽을 수 있다.



사람이 결국은 상황의 마지막을 결정한다. 그 위에서는 제도와 법, 자국 정부의 정책이 큰 틀을 이루지만 밑에서는 사람이 모든 결정을 좌지우지한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중요하다. 적군을 맞아 함께 싸우는 전장에서 그 인간관계는 특히 중요하다.



버크 제독을 만났을 때도 나는 그로부터 가능하면 많은 것을 배우고자 힘썼다.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그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점을 버크는 충분히 알았던 모양이다. 그런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나는 버크 제독을 활용했다.



밴플리트 8군 사령관 앞에서 그를 ‘나의 포병 사령관’으로 당돌하게 호칭했고, 버크 제독은 그를 여유 넘치는 태도로 받아 준 것이었다. 밴플리트 사령관도 그에 대해 토를 달지 않았다. 미군은 그렇게 소통과 신뢰를 중시하는 편이었다. 신뢰가 쌓일 경우 전폭적으로 국군을 지원해주는 존재가 바로 당시 한국 땅에 와 있던 미군이었다.



내가 버크 제독에게 충분한 신뢰감을 주지 못한 상황에서 밴플리트 8군 사령관 방문을 맞아 즉흥적으로 그를 ‘나의 포병 사령관’으로 호칭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예상치 않은 그런 호칭에 버크는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싸기 그지없는 ‘캐딜락 포탄’을 우리 1군단 정면의 적 진지에 퍼붓는 수고는 가능한 한 피하려 애썼을 것이다. 그런 미 5순양함대의 막강한 지원으로 우리는 전선을 튼튼하게 막았다. 고지전에서도 적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와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총사령부는 당시 장기적으로 전선을 방어할 대책 마련에 골몰했다. 그러나 입장 차이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이 무기와 장비만 지원해준다면 국군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미군 지휘부의 생각은 달랐다. 무기와 장비보다는 능력과 자질을 제고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기존의 사단조차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기와 장비 지원은 낭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강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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