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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이 책 읽는 仙人讀書穴 명당 인권·민주화 이끈 ‘한국의 바티칸’

<1> 명동대성당 종탑과 남산 서울타워가 성(聖)과 속(俗)을 교감이나 하듯 나란히 서 있다. <2> 학생과 시민들이 1987년 6월 당시 명동대성당 앞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3> 성당 입구의 이재명 의사 표석에는 그가 평북 선천 출신이었음과 1909년 벨기에 황제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칼로 찌르고 체포됐다고 써 있다. <4> 한 신도가 성당 뒤편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을 향해 기도하고 있다. 신동연 기자, 중앙포토
지난 5월 10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시국 미사가 열렸다. ‘4대 강 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가 정부의 4대 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대규모 시국 미사였다. 천주교 사제 300여 명과 신도 7000명이 본당과 꼬스트홀, 성당 앞마당과 비탈길을 가득 채웠다. 명동성당에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국 미사가 열린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23년 만이다.

해마다 6월이 오면 명동대성당을 민주화의 성역으로 만들었던 6월항쟁이 떠오른다. 당시 전투경찰의 최루탄과 몽둥이에 밀려 학생들이 명동대성당 안으로 몸을 피했고, 경찰들이 그들을 잡으러 쫓아왔다. 그때 김수환 추기경이 나섰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추기경의 단호한 언명은 기적을 불러냈다. 경찰이 썰물처럼 철수했고, 농성을 푼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그 뒤 6·29 선언이 발표됐고 직선제 개헌을 단행했다.

언덕배기 아래에서 이완용 피습
지난해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추기경을 숭경했기에 18일 오후 1시40분, 명동역 근처 기나긴 조문행렬 끝자락에 섰다. 행렬은 세종호텔 블록을 한 바퀴 돌아 가톨릭회관을 감돌았다. 춥고 다리가 아팠다. 그것은 고행의 순례길이었다. 장장 3시간20분을 기다려 비로소 연도실 유리관 안에 누워 계신 추기경을 참배할 수 있었다.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진리 인식의 질서에 바친 분, 스스로 바보이기를 자처했지만 그분은 시대의 횃불이자 국민의 스승이었다.

다시 6월이다. 명동대성당 사거리에서 예전과는 사뭇 다른 심경으로 명동길에 접어든다. 언덕배기 아래, 주차장 바로 못 미친 느티나무 그늘 밑 표석 하나가 서 있다. 1909년 12월 23일, 오전 11시30분께 이재명(李在明·1890~1910) 의사가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을 칼로 찌른 곳이다. 명동대성당에서 있은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했던 이완용은 인력거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군밤장수를 가장한 청년 이재명은 비수를 들고 삽시에 달려들었다. 제지하는 인력거꾼 박원문을 단칼에 쓰러뜨리고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다. 이재명 의사는 혼비백산해 인력거에서 떨어지는 이완용을 그대로 올라타고 앉아서 두 번 더 비수를 찔렀다. 이완용은 늑간동맥이 절단됐으나 일본인 의사 스즈키의 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진다. 이재명 의사는 1910년 9월 13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후 이완용은 1926년 자택에서 자연사할 때까지 더 이상의 테러나 린치를 당하지 않는다. 일경의 보호 아래 온천도 다니고 금강산 유람까지 한다. 이완용이 죽자 고종 인산 이래 최대 조문 인파가 몰려서 애도했다. 바로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망국의 책임소재를 찾는 복잡한 진실게임이 들어 있다.

우리는 우리 역사의 개기일식기인 구한말을 다분히 감정적으로만 봐왔다. 피압박 민족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망국 100년인 올해만큼은 돋보기와 졸보기를 양손에 들고서 역사의 진실 찾기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 나라는 개인이 팔아먹는 게 아니라 힘이 없어서, 혹은 체제에 적응하지 못해서 빼앗기는 그런 결사체이기 때문이다.

가증스러운 인물 이완용은 분명 대표적인 반민족주의자다. 하지만 그간 우리가 너무도 당연시해 온,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더는 버텨내지 못할 상황에서 총리대신 이완용은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위임을 받고 한일강제병합 문서에 서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순종은 그런 그에게 최고훈장을 내린다.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체제의 문제를 특정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세우는 건 속죄양 만들기를 넘어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본당의 뾰족한 종탑을 보며 가풀막을 오른다. 첨탑 앞 성모 마리아상 근처에서 성역 공간 밖을 둘러싼 고층 빌딩숲을 본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가 별반 구별되지 않는다. 사방이 초가집이나 저층 기와집 일색이었던 구한말의 풍경과는 딴판이다.

1784년 가톨릭 신앙공동체 처음 생겨
조선시대 한양의 명례방(明禮坊)에 속한 이 구릉의 지명은 종현(鐘峴)이다. 원각사(圓覺寺)의 종을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이곳에 옮겨 단 이래 ‘북달재’, 곧 종현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은 한국 가톨릭의 상징인 명동대성당의 종탑이 우뚝 솟구쳐 있으니 지명과 절묘하게 걸맞다. 본래 이곳은 남산 4대 명당으로 신선이 책을 읽는 형국의 선인독서혈(仙人讀書穴)의 길지로 알려져 있다. 책상에 해당하는 안산은 광화문 동아일보 구 사옥 자리 일대에 있었던 황토마루였으나 일제가 남대문까지 곧게 도로를 내면서 사라지고 없다.

1784년, 이곳 명례방에서 가톨릭 신앙공동체
가 성립되었다. 그후 1882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제7대 교구장 블랑(Blanc) 주교가 성당 터를 매입하기 시작한다. 블랑 주교는 한·불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내는 정지작업을 한다. 그러다가 풍수지리설과 관련해 성당의 위치 문제로 조선 정부와 토지분쟁이 일어난다. 종현 마루 성당 건물은 경복궁을 위압하는 형국이었고, 뾰족한 종탑은 첨창(尖槍)이라 하여 풍수지리설에서 극히 꺼리기 때문이다. 5년 가까운 분쟁 끝에 1892년 5월 8일, 어렵사리 기공식을 하게 된다.

명동대성당의 방향 축은 경복궁을 의도적으로 향하고 있으며 종탑은 왕궁을 겨누고 있는 첨창 형국 그대로다. 김기성(35)씨는 2003년 서울시립대 건축과 석사학위 논문 1890~1910년대 천주교 교회의 도시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에서 그 사실을 상세히 논증하고 있다. 김성홍 교수가 지도한 논문이다. ‘도시 내에서 교회의 위계를 왕궁의 위계보다 높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외국인 선교사들은 공공연히 교회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해, 성당을 크고 높은 곳에 궁과 대응해 지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명동대성당에 있어서 교회의 방향성은 교회의 정면이 도시의 중심지를 향하면서도 경복궁이라는 도시적 상징물에 대응하는 방식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100여 년 전, 제국주의의 침탈에 시달렸던 조선은 종교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듯싶다. 일제는 우리 땅 곳곳에 쇠말뚝을 박아 이른바 풍수침략을 자행했다. 프랑스 제국주의는 교회 건축물로 그 기능을 대신했던 셈이다. 한국 교회는 박해 속에서 공격적인 선교를 해왔다. ‘한국의 바티칸’ 명동대성당은 거듭나서 현대사에 끼친 순기능이 참으로 크다. 명동대성당은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되어 한국 사회의 발전과 인권 신장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미래에는 어떤 성역으로 자리매겨질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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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