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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텔 주교, 일제 환심 사려 데라우치 암살 정보 밀고

1892년(고종 29년) 8월 5일 블랑 주교의 뒤를 이은 제8대 교구장 구스타브 뮈텔(G.C.M. Mutel, 1854~1933·사진) 주교는 명동대성당 정초식을 한다.

뮈텔을 포함한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은 문화우월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예수회나 프란체스코회 등과 같은 수도회 성격이 아닌 선교회 성격을 취한 단체였다.

조선의 국권이 일제에 탈취당하던 당시, 서울교구장은 뮈텔 주교의 관할이었다. 그는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시신교부를 주장했던 안정근·공근 두 동생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뉴스를 접하고는 ‘매우 당연한 일이다’는 논평을 내서 원성을 산다.

안중근은 천주교 신자였다. 세례명 토마스의 몸은 일제가 사형에 처했지만 그 영혼은 가톨릭에 의해 또 한 번 처형당했다. 뮈텔 주교는 일개 천주교 신자보다 일본 제국주의의 환심을 사는 게 더 중요했다. 차제에 일제로부터 교회의 안전을 보장받을 필요가 있었다.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 출신 주교다웠다.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교회가 안정적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던 걸까.

안중근 의사의 영세 신부 빌렘은 1911년 1월 11일, 안 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 야고보로부터 데라우치 총독 암살 계획을 듣고는 뮈텔 주교더러 일본 헌병대장에게 알리라고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받은 뮈텔 주교는 즉시 헌병대장에게 찾아가 고한다. 때마침 걸려 있던 교회의 땅 소송 문제를 유리하게 로비하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그 때문에 독립지사 105인이 잡혀가게 된다.

오늘날, 한국 가톨릭은 국민적 호응을 받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일제 때까지는 매우 부정적인 면이 강했다. 1920년 여름, 명동대성당과 그 인근에서 발생한 수해 사건이 한 예다. 8월 1일 폭우가 내려 명동대성당 제대 뒤 언덕을 무너뜨려 채소밭과 우물을 덮어버렸다. 그로 인해 많은 가옥이 흙더미 속에 묻혔다. 성당 지하실로 물이 들어갈까 봐 서편 언덕에 물길을 터서 가옥이 파묻히게 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하실에는 1839년 기해년 9월 12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유골이 묻혀 있었다.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됐다가 서강대가 있는 노고산을 거쳐 1901년에 이곳으로 모셔진 것이다. 어쨌든 이 수해 사건은 명동대성당이 얼마나 민심으로부터 이반돼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1985년 명동 천주교 200년사 자료집으로『뮈텔주교일기』가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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