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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견과 반론이 있어야 재판이 건강해진다

행방불명된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손가락 뼛조각이 발견됐다. 실종자는 살아 있을까, 죽었을까. 일단 손가락은 전동 톱으로 절단됐다는 추정이 나왔다. 경찰은 그 도구의 판매처를 찾아냈다. 구입자는 다름 아닌 남편. 그는 국외 도주를 시도하다 공항 출국장에서 체포됐다. 상당한 유죄의 정황·증거들이 추가로 발견됐다.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는 살해된 후 시신이 훼손돼 모처에 유기된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피고인은 무고함을 호소했다. 잠적한 피해자가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유죄인가?

재판 막바지에 가서야 뭔가 빠뜨린 것을 알게 됐다. 생존 흔적에 대한 탐사였다. 놀랍게도 실종 후 여전히 피해자의 휴대전화로 수백 건에 달하는 통화가 이뤄져 왔다. e-메일을 계속 쓴 정황도 포착됐다. ‘유령이 아닌, 살아 있는’ 피해자와 직접 교신을 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나온다면, 모든 유죄의 증거는 무너질 판이었다. 결론을 내리기까지 재판 과정은 무척이나 험난했다.

경찰관은 압도적 살인 정황 속에서 모순 증거 수집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정보 편향의 덫에 빠진 탓이다. 매사추세츠대 의사결정 연구 권위자인 토머스 키다 교수는 그의 저서 『생각의 오류』에서 이런 함정에 빠질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증거만 찾는 경향이 있다.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어울리고 지향점이 비슷한 잡지와 책만 찾아 읽는다. 중요한데도 믿음과 상충되는 증거들은 무시·외면해 버린다. 거기에 실수와 오판이 따른다.

판사들은 한 사건 재판을 위해 같이 시간을 보낸다. 합의 과정에서 의견이 다름을 확인할 때가 있다. 의견 일치에 이르는 고통스러운 시간 때문에 일이 힘들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불확실함은 행복의 시작이다. 반대되는 입장에서 자신의 판단을 되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판사들은 상반되는 다른 증거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엄연히 있는 증거가 왜 보이지 않았는지 놀라게 된다. 눈은 카메라가 아니다. 눈이 아니라 뇌로 본다. 뇌가 보고 싶은 것만 볼 뿐 나머지는 보지 못한다. 올바른 의사결정을 위한 중요한 체험 학습 기회가 되는 셈이다.

첫 합의에서 빙고! 만장일치는 우리를 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종종 오판으로 이어지는 더 큰 고통의 독이 될 수 있다. 찰떡궁합 만장일치 재판부는 불행의 씨앗을 품을 수 있으니 조심하는 편이 좋다. 하버드대 법대 카스 선스타인 교수 연구진이 미국 판사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반대 성향 의견이 존재할 때 더욱 바람직한 재판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스타인 교수는 그의 저서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에서 한 국가사회도 획일화된 집단 동조로 오판을 할 위험을 지적한다. 언제 어디서나 위대한 반대자는 필요한 법이다.

배석판사들이 재판장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재판부 안에서 반론이 잘 제기되지 않는 곳이 있다. 소통 불량의 재판부·팀·조직·회사·사회는 추락의 위기를 겪을 수 있다.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아웃라이어』는 대한항공 괌 추락사고를 이런 위험의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블랙박스에는 기장의 판단이 틀렸음을 잘 알면서도 이견을 달지 못하는 승무원들의 안타까운 숨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잠시 후 254명의 탑승객 중 228명이 사망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이런 위기의 재판부를 위해 재판장 연수 과정에서 들려주는 팁이 있다. 특히 어려운 사건일수록 재판장은 일부러라도 엉뚱한 의견을 조금씩 흘려라. 불합리한 의견을 갖게 된 재판장 설득 때문에 배석판사들을 고심하게 만들어라. 그런 다음 경청하라. 올바른 팀 결정을 만든 성취감을 갖게 하라. 다만 너무 자주 이런 수법을 쓰지는 말 것과 고생시킨 만큼 격려차 식사라도 같이할 것.

다양한 생각의 교류는 번영의 지속을 위한 사회 진화의 기반이라고 동물학자 매트 라이들리는 최근 저서 『The Rational Optimist』에서 주장한다. 민주사회는 다수결이 전부가 아니다. 그 요체는 합의에 이르는 과정과 절차에 있다.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상호 반론으로 타당성이 검증되는 과정. 그것이 민주사회를 강하게 만든다.

세계 일류 국가 도약, 창의성의 확보가 화두다. ‘다른 생각’을 보듬을 수 있는 문화적 관용성이 밑거름이다. 반론 소통이 원활한 재판부, 판사들 사이의 이견, 재판에 대한 이견들 모두가 대한민국 재판의 건강성을 나타내는 징표다. 사회도 서로의 이견을 교환하는 절차에 좀 더 익숙해져야겠다. 재판은 그러한 절차를 익히는 산교육장이다.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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