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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70·끝>못다 한 이야기들

1970년 초에 문학기자 일을 시작했다가 79년 2월 초 문화부 데스크를 맡으면서 그 일에서 물러났다. 햇수로는 10년이었지만 9년을 겨우 넘겼고 나는 아직 30대였다. 생각 같아서는 몇 년쯤 더 문학기자로 뛰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문학기자를 처음 시작하던 무렵 당시 동아일보에서 문학기자로 일하고 있던 김병익을 만나 ‘우리나라에 문학평론은 있으되 문학 저널리즘은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한국문단에 문학 저널리즘의 토양을 구축해 보자’고 다짐했던 기억이 새롭다. 10년 동안 그때의 다짐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자신 있게 내세울 만한 것은 없지만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의욕적이었고 그래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음은 분명하다.

‘문단 뒤안길’의 연재를 시작한 것은 그 70년대에 내가 겪었거나 느꼈던 문단의 뒷이야기들을 거리낌 없이 써보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니 쓰기 어렵거나 거북한 이야기들이 더 많았다. 무엇보다 문인 개개인의 사생활이나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대목에서 그랬다. 미국이나 유럽의 문화 선진국에서는 특정한 문인의 작품세계를 연구하고 분석하기 위해 생애의 미세한 부분까지 속속들이 파헤치는 경우를 많이 봤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자칫하다가는 구설에 휘말리거나 ‘명예훼손’의 멍에를 뒤집어쓰기 십상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77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원로 여류작가 박화성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서 1920년대의 문단 뒷이야기를 연재할 때의 일이다. 중반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신과 모윤숙이 이광수를 사이에 놓고 ‘삼각관계’에 빠진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광수는 30대 후반의 기혼이었고 박화성은 그보다 열두 살, 모윤숙은 열여덟 살 아래의 미혼이었다. 이광수는 처음에는 자신을 무척 아껴주었으나 차츰 ‘더 젊은’ 모윤숙에게 기울었다고 썼다.

이런 내용의 글이 게재된 뒤 나는 몇 통의 전화와 두 통의 편지를 받았다. 한결같이 박화성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50년이나 지난 옛이야기를 새삼 들춰내는 저의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특히 한 편지는 박화성의 결혼 전 이런저런 일들을 샅샅이 들춰가며 매섭게 몰아세웠다.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으나 이런 사소한 일조차 도덕적·윤리적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 우리네 정서인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제약이 있었다 해도 30~40년이 지난 뒤 우리 문단과 문인들의 뒷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문학과 문단, 그리고 문인에 대한 나름대로의 애정도 한몫 했을 것이다.

물론 즐거운 기억들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여류작가는 ‘남미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위대한 영웅으로 하늘처럼 떠받들고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자신의 ‘남미 기행문’을 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영진에 ‘정 아무개는 공산주의자가 분명하니 즉각 해고하고 관계 당국에 고발하라’는 내용의 투서를 보내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후배 소설가는 신춘문예에 단골 응모하던 시절 자기 작품이 당선작으로 결정됐는데 막판에 정 아무개가 당선작을 바꿔치기해 낙방한 적이 있다는 터무니없는 헛소문을 문단에 퍼뜨려 입맛을 씁쓸하게 했다.

어쨌거나 70년대, 그리고 문학기자 시절과 관련한 마지막 추억이 있다. ‘혼불’의 여류작가 최명희(1947~98)다. 최명희의 80년도 신춘 ‘중앙문예’ 소설부문 응모작인 ‘사소한 이야기’가 당선작으로 결정된 것은 79년 12월 20일께였다. 심사위원들(유종호·최인훈·이청준)은 당선작 결정과 함께 제목은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선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온 최명희는 “너무 감격스러워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며 제목 바꾸는 일을 우리에게 일임했다. 그럴듯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 가운데 제목을 바꿀 수 있는 시한을 하루 앞둔 전날 저녁 신촌의 한 소극장에서 한국시인협회의 시극(詩劇)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다. 캄캄한 무대에 두 시인이 등장해 대사를 읊는 가운데 무대 좌우에서 강렬한 조명이 두 사람을 향해 교차되더니 슬그머니 스러졌다. 빛이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쓰러지는 빛!

최명희의 데뷔작 제목은 ‘쓰러지는 빛’으로 결정됐다. 최명희는 “태어나려는 생명에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다”며 기뻐했다. 이 작품은 ‘혼불’이라는 대작을 쓰기 위한 워밍업이었다. 등단 후 최명희는 교사직도 그만두고 ‘혼불’ 집필에 매달려 15년 만인 90년대 중반에 완성했지만 그 무렵 난소암이 발병하고 있었다. ‘혼불’ 한 질을 들고 찾아와 점심을 나눈 것이 마지막이었다. 98년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하고 곧바로 세상을 등졌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는 이번 회로 마칩니다.
그동안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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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