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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부끄러워할 일이 없으면 후회할 일도 없다

시간 참 빠릅니다. 여러분을 만난 지 어느새 한 달 보름이 됐습니다. 벌써 잔소리가 듣기 싫어진 건 아니겠지요? 저는 잔소리하는 게 즐겁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건 갸우뚱하건 반응이 하나 둘 쌓이면서 그 즐거움이 더 커집니다. 그런데 개중엔 이런 반응도 있는 것 같습니다. ‘글쎄, 옳은 얘기이긴 한데 저는 늘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 하는 거지요. 정당한 의문입니다. 제가 처음 이런 글을 써도 될는지 고민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감히 ‘세상사 편력’이라는 제목을 단 이유를 설명한 것도 기억하시지요?

맞습니다. 저도 늘 그렇게 살진 못했습니다. 여러분 나이 때 할 만한 크고 작은 일탈도 많이 해봤고요. 제가 여러분께 늘 간직하라고 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말은 뜻도 몰랐었겠지요. 그러면서도 겉모습에만 잔뜩 힘주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옛날 얘기 하나 할까요? 당나라 때 유명한 시인이자 정치가인 백낙천이 항주 자사로 부임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는 도림선사라는 고승이 수행하고 있었지요. 선사는 늘 나무 위에 자리를 펴놓고 참선을 했기 때문에 새 둥지 스님이라고 불렸습니다. 하루는 백낙천이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선사는 수령이 왔는데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백낙천이 나무 위를 쳐다보며 선사에게 청했습니다. “삶의 가르침을 주십시오.”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 고상한 법문을 기대했던 백낙천은 실망했습니다. “그깟 것은 세 살 먹은 아이도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선사는 돌아보지도 않으며 말했습니다.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알기는 쉽지만 팔십 먹은 늙은이도 행하기는 어려우니라.”

백낙천은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겠지요. 알고도 행동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아예 알지도 못했던 거잖아요. 그런 겁니다. 진리는 늘 눈앞에 있는데 어두운 우리 눈이 등잔 밑을 못 보는 거지요. 저도 그런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겉멋 잔뜩 든 껍데기 속에 가려진 초라하고 볼품없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된 거지요. 한동안 고민을 했습니다. 몇 차례 시행착오를 겪다 보니 도림선사처럼 도가 트이진 않더라도 어렴풋이 잡히는 감이 있더라고요. 찬물과 뜨거운 물을 번갈아 틀며 “앗 뜨거워” “앗 차가워”를 반복하는 ‘바보의 목욕’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순 없잖아요. 적어도 지난 내 허물이 무엇이었는지, 먼 길 가는 데 주머니에 채워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은 뭔지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더란 말입니다.

그 감에 따라 제가 도림선사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범절 있게 살아라.” 이 말은 제가 평소 입버릇처럼 하는 말입니다만은, 여러분 표현대로 하자면 “간지 나게 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겉모습만 번지르르하다고 ‘간지’가 나는 게 아닙니다. 외양에 걸맞은 내면이 있어야 하는 거지요. 값비싼 외제차 타고 다닌다 해서 간지 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외제차가 신호 위반하고 과속하며 다른 차들에 피해를 준다면 오히려 ‘싼티’가 나는 겁니다. 그런 차에서 범절 있는 사람이 내리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범절이 있다는 건 한마디로 부끄러울 게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일에서 다 그렇습니다.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면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하고 팔자에도 없는 욕심을 내다가 나중에 망신당하고 땅을 칩니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돈대에 오르는 사람들을 보며 그런 모습을 묘사합니다. “오를 땐 앞만 보고 올라갔기 때문에 위험을 몰랐는데 내려오려고 밑을 보니 현기증이 절로 난다. 벼슬살이도 이와 같아 위로 올라갈 때는 한 계단이라도 뒤질세라 남을 밀어젖히며 앞을 다툰다. 그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곳에 이르면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고 뒤로도 천 길 낭떠러지여서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오지도 못하게 된다.”

늘 내려갈 때를 생각하고 올라가야 합니다. “밤에 편히 잘 수 있을 만큼만 걸어라”는 미국 속담도 있습니다. 늘 삼가고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잘나가려고 남을 밀어젖히는 것도, 잘나간다고 남을 짓밟는 것도 범절 없는 짓입니다. 부끄러운 행동입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잘나가던 집권 여당이 패배한 이유도 다른 게 아닙니다. 그러고도 남 탓만 하는 건 더욱 범절 없는 일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매사 범절 있게 하세요. 더디 간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간지가 거저 얻어집니까? 비용이 드는 겁니다. 하지만 기꺼이 비용을 들이세요. 나중에 보면 누구보다 멀리 와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그게 범절의 힘입니다.

이훈범 중앙일보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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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