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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한국은행 출범…불과 13일 후 6·25전쟁 터져

 
  1950년 7월 22일에 발행된 천원권과 백원권 지폐.
 
유학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투웨이밍 교수는 한국에서 부러운 것이 하나 있다. 지폐에 있는 인물이 모두 학자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화폐에 등장하는 초상화는 대체로 독립이나 건국의 영웅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한국의 경우 천원, 오천원권이 모두 학자로 채워져 있으며 그나마 유일한 정치인인 만원권의 세종대왕 역시 한국인들에게 군주의 이미지와 함께 한글을 창제한 학자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폐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전쟁 중에 발행된 첫 지폐의 천원권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백원권에는 남대문이 그려져 있었다. 1952년 10월 10일에 새로 발행된 오백원권의 앞면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뒷면에는 탑골공원이 그려져 있다. 한국의 지폐도 처음에는 그리 부러워할 것이 못 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처음 지폐를 발행할 때는 지폐의 도안을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은행을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으로 개편한 것이 50년 6월 12일이었고, 13일 후에 전쟁이 터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건전 통화의 유지, 그리고 정치적 중립성 보장이라는 한국은행 창립 목적인 중앙은행 고유의 정책 자체를 실행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전쟁을 통해 유엔군에 대여할 돈을 찍어내다 보니 통화가 팽창했고,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을 막거나 안정된 환율을 유지하는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61년 이후 한국은행의 외환관리 업무가 재무부로 넘어가면서 한국은행의 역할은 더 축소됐다. 이로 인해 한국은행은 97년의 외환위기까지 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발행된 다양한 기념주화들은 한국은행의 정치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증거가 되었다. 70년 반만년 역사 기념주화를 시작으로, 78년 세계 사격선수권대회 기념주화, 81년 5공화국 수립 기념주화, 82년과 83년 2차에 걸친 올림픽 유치 기념주화 등의 발행은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 남발했던 명예박사 학위와 비슷하게 오히려 ‘기념’의 정도를 떨어뜨렸다.

97년 금융위기라는 극약처방을 받고서야 중립적인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도록 한국은행법이 개정되었다. 금융통화위원회가 다시 설치되었고, 여기에 재경원 장관의 참여를 배제했던 것이다. 중앙은행이 정부와 경제정책에 보조를 맞추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장을 추진하기 마련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견제함으로써 더 이상 심각한 경제위기를 경험하지 않도록 보수적인 시장 안정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닐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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