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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108) 한국군이 배워야 할 군대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사람은 그 나라의 군인이다. 군은 국가와 민족의 보루(堡壘)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60년 전에 벌어진 전쟁의 주역은 국군이 아니었다. 1950년 전쟁이 터진 직후의 양상은 북한군과 국군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국군은 북한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렸다. 전쟁 발발 두 달 뒤에 벌어진 낙동강 전선에서의 싸움은 북한군의 마지막 공세였고, 김일성의 군대는 이 전선을 뚫지 못하면서 한국전쟁의 주역이 아닌 조역으로 전락했다. 그 뒤의 싸움에서 새로 참전한 중공군이 적군 병력의 80%를 차지했고, 북한군은 나머지 20%의 역할을 맡는 데 그쳤다.

아군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낙동강 반격 뒤 북진, 인천상륙작전과 평양 진공 등의 각 전선에서 국군의 활약이 있었지만 전체 군사적 역량 가운데 약 30% 정도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주역은 미군이었고, 16개 연합국 참전 병력이 그 뒤를 받쳤다. 장기적으로는 국군이 스스로 안보를 모두 책임지는 게 정답이다. 그러나 화력과 장비, 조직력 등에서 국군은 마땅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당시의 젊은 층 인구를 감안해 병력 수를 100만까지 늘릴 수는 있었으나 다른 여건이 이를 따라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늘 미군 지휘관들에게 장비와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이 대통령은 “병력 수는 충분하다. 무기와 장비의 지원만 따라준다면 우리 스스로 전선을 지킬 수 있다”며 호소를 했지만 미군 지휘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국군이 중공군에게 허망할 정도로 밀릴 때면 미군 지휘관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어디 이런 게 군대냐”면서 면박을 하기 일쑤였다. 개전 초기에도 국군에 대해 월턴 워커 당시 미 8군 사령관은 이 대통령에게 “조직도, 능력도 없는 군대”라면서 마구 비판했다.

국군은 싸움을 통해 전투력을 꾸준히 향상해 나갔다. 미국 NBC의 ‘전설적 기자’로 통하는 존 리치(92)가 6·25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하던 중 찍은 국군의 사진이다. [연합뉴스]
내가 겪은 전선에서의 국군은 이런 특징을 보였다. 위기 때에는 강력하게 뭉쳤다. 단결력도 강했고, 싸우려는 의지도 뜨거웠다. 그래서 적에게 몰렸을 때에는 강렬한 반격을 할 수 있었다. 위기는 그래서 곧잘 넘기고는 했다. 그러나 위기 상황이 풀렸을 때에는 늘 문제가 생겼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총력전을 막아낸 것에는 국군의 결사항전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모두 잘 싸웠다. 이름 없이 전선에 뛰어든 무명의 용사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적과 싸우고 또 싸웠다. 군문에 이미 몸을 담고 있던 장병도 용감히 적과 맞서 싸우면서 조국의 산하를 지켜냈다.

그러나 우리가 북진하면서 통일을 눈앞에 뒀을 때 국군은 위기 상황 때와는 다른 면모를 드러냈다. ‘통일이 곧 다가오는데 내가 왜 목숨을 바쳐야 하느냐’면서 잘 나서지 않으려는 장병이 눈에 많이 띄었다. 국군 구성원끼리의 불필요한 경쟁심리가 불붙는 경우도 많았다. 명예를 먹고 사는 군인으로서는 공을 다투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국난의 상황에 닥쳐 먼저 무리하게 공을 세우려는 모습도 많이 나타났다. 그런 경쟁심리가 뜨거워져 마침내는 분열과 반목의 조짐도 생겨나기도 했다.

내가 1군단장을 맡고 있을 때 만난 미 해군제독이 한 사람 있다. 동해안에 떠 있는 미 함대를 지휘하는 인물이었다. 오랜 교분을 이어가는 사이가 된 알레이 버크 소장이다.

국군에 유일하게 남은 군단급의 사령관으로서 국가 안보를 스스로 책임질 미래 국군의 양성 문제로 내가 나름의 고민에 빠졌을 때 그는 이런 얘기를 해줬다. “군대의 양성은 짧은 기간에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장비와 무기가 따라줘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 경험’도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그는 해군 양성은 최소 100년이 걸린다고 했다. 그가 말한 민족의 경험이라는 것은 북구 유럽의 바이킹 전통, 일본군의 왜구(倭寇) 전통 등이라고 했다. 미군에게는 서부를 개척하고 한때 분열했던 남북의 통일을 이룬 전통이 있었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대한민국 국군에게는 어떤 민족 경험이 있을까.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항전(抗戰)의 정신이 우리에게는 뿌리 깊이 내려오는 것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외세가 물러간 상황에서 늘 풀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들이 줄을 이었다.

한국인은 강하다. 외세에 눌리면서도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나름대로 정체성을 이어갔고, 화려한 문화의 토대도 쌓았다. 그런 강인함을 안고 있는 나라의 군대가 상시적이면서 변함없이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한 정신력 못지않게 치밀한 조직력과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전선이 요동칠 때도, 평화가 찾아왔을 때도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면서 안보의 힘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 땅에서 태어나 경험한 다른 나라의 군대들을 생각해 봤다. 일본군은 강하지만, 탄력적이지 못했다. 전선에 뛰어든 중공군은 막강한 병력과 기이한 전법으로 우세를 점하고는 했지만 전체적인 틀을 오랫동안 유지하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서 늘 미군은 관찰의 대상이었다. 상황이 닥치면 무섭게 조직력을 발휘하는 미군을 보고 배우는 일이 큰 과제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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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