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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107) 중공군 패주의 의미

중공군은 밤에 유령처럼 다가왔던 존재다. 정면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늘 몸을 숨기고 아군의 허점을 노렸다. 치밀한 계산이 돋보였던 데다가 ‘선택과 집중’을 통해 힘을 분산시키지 않으면서 좀 더 효과적으로 상대를 공격할 줄 아는 군대였다.



유령처럼 덮쳐온 밤의 군대 … 속임수는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 10월 말, 차가워진 날씨 속에 평안북도 일대의 험준한 적유령 산맥을 넘어왔던 중공군은 이듬해 봄 막바지 대규모 공세에서 패주한 뒤 그때까지와는 사뭇 다른 존재로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상대방 전선의 한곳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밀고 내려와 포위를 노리는 기동전은 그 뒤로는 다시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특정 고지를 향해 덤벼드는 소모전 양상으로 나왔다. 모두 대관령을 비롯한 동부전선에서 아군에 밀려난 뒤의 일이다. 그들은 생각보다 처절한 희생을 그 전장에서 치러야 했다. 대관령에서는 국군 1군단에 의해 진격이 막혔고, 스스로 뚫고 들어온 인제 정면의 서쪽에서는 강력한 미군 2사단과 그 뒤를 받쳐줬던 미 3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이들은 막바지 대규모 공세에 승부수를 던졌으나 길어진 보급선과 그 중간을 파고 들어오는 미군의 공습을 견디지 못했다. 그 결과 전선의 장병에게 충분한 식량과 물자, 화력을 제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패주하면서 막심한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수많은 포로와 전사자를 남겼다. 그 뒤로 중공군이 한국의 모든 전선에서 참전 초기와 같은 대규모 공세를 펼치지 못한 것은 당시의 피해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51년 4월의 춘계 제5차 1단계 공세와 5월의 2단계 공세에서 중공군은 장점과 약점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들은 초반 공세에서 늘 미군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전법을 구사하면서 전선을 뚫고 들어오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역시 그 뒤를 지속적으로 받쳐주지 못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전술적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1951년 3월 미 해병대원이 중부전선에서 중공군 포로를 잡은 모습이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내가 대관령에서 맞이했던 저들의 공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처음에 미 10군단의 동쪽과 국군 3군단의 전투지경선을 뚫고 물밀 듯이 밀고 내려오는 데에는 성공했다. 중공군은 미 10군단과 국군 3군단이 관할권을 두고 갈등을 벌였던 오마치 고개의 전략적 중요성도 제대로 파악했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25㎞ 이상을 치고 내려오면서 그 전략적 요충을 점령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국군 3군단은 그 공세에 궤멸하다시피 무너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군은 초반의 실패에 아랑곳하지 않고 경기도 광주의 미 3사단을 전략적으로 이동시켜 뚫린 전선의 저변(底邊)을 막았다. 미 2사단은 그에 힘입어 중공군이 밀고 내려간 전선의 서쪽을 견고하게 지켰고, 국군 1군단은 동쪽의 전략지역인 대관령을 막았다.



중공군은 선으로 길게 뚫고 내려온 종심(縱深)을 확보했지만, 더 이상 아군의 전선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보급선이 자체의 수송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길어졌던 것이다. 미군은 길어진 중공군의 보급선을 자주 잘랐다. 중공군의 뒷심이 달리기 시작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전법 구사에도 한계가 있었다. 미군이 그들의 싸움 방식에 적응하면서 더욱 그랬다. 국군도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적, 중공군에게 느꼈던 이상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있었다. 깊은 밤에 흘러드는 피리 소리와 꽹과리 소리도 그에 적응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단순한 심리전 이상의 효과를 올리기 어려웠다.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중공군은 바닥을 드러냈다. 한곳만을 집중해 병력과 화력을 집중하는 인해전술(人海戰術)식 기동전술은 당장에는 효과가 크지만, 전선을 뚫고 내려와 상황이 복잡해지는 경우에 있어서는 자체적인 혼선을 빚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우회와 매복, 선택과 집중에 의한 종심 확대는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막상 아군의 배후를 뚫고 내려온 뒤로는 전술적인 환경이 매 시각 급격하게 변했다. 그들은 아군의 정면을 뚫을 때의 전투방식을 정형화(定型化)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뒤의 상황에 대해서는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다.



스스로 구사해 온 임기응변(臨機應變)식의 돌파 방법이 변화가 변화를 낳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경우의 수가 더욱 복잡하게 꼬여가는 환경에서는 자충수로 이어지기 십상이었다.



당장에는 효과를 보기 좋은 게릴라식 병력 운용이 한계에 닥친 것이다. 정공법은 우직해서 효과를 즉시 거두기 어렵지만 틀을 세우고 기초를 다질 수 있는 장기적인 군사 운용법이다. 그에 비해 상대방을 속임수에 빠뜨리는 편술(騙術) 식의 우회와 매복, 기습과 기만 등은 일시적인 효과를 거둘 수는 있지만 오래 이어갈 수 없는 병력 운용법이다. 중공군은 이 방식으로 공세를 펼쳤지만 그 위력이 드디어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일시적인 두려움으로 국군과 연합군에 다가올 수는 있었지만, 진정 강한 군대는 아니었다. 그들의 유연한 사고방식과 물처럼 자연스러웠던 초기 공세에서의 병력 운용법은 그 일부를 칭찬할 수는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보고 배울 만한 대상은 아니었다. 최소한 내 생각에서는 그랬다.



우리가 시급히 배우고 익혀야 할 대상은 미군이었다. 자유분방해서 때로는 불안한 듯 보이지만, 임무와 목표를 분명히 상정한 뒤 강한 조직력과 기동력으로 적에 맞서는 현대화된 군대인 미군 말이다. 그 기회가 자연스레 다가오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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