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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108> 대한민국 펀드의 역사

국내 첫 펀드인 ‘안정성장 1월호’가 세상에 나온 지 40년이 됐습니다. 펀드가 대중화된 것은 10여 년에 불과하지만 국내 펀드는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내 펀드 순자산은 342조원(5월 20일 기준)으로 세계 14위입니다. 펀드는 주식시장의 부침에 따라 투자자를 웃기고 울렸지만 한국 자본시장과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간접투자 방식으로 우리 생활에 자리 잡은 펀드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3월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이 개최한 ‘생활 속의 펀드 이야기’란 전시회에서 나온 자료를 중심으로 펀드의 역사를 재구성했습니다.

하현옥 기자

40년 전 처음 나온 국내 펀드, 수익률 26% 낸 뒤 지금도 굴러갑니다
1970~1981(유아기) 걸음마를 시작하다


1974년 9월 한국투자신탁 설립과 함께 출시된 최초의 공사채투자신탁 광고 팸플릿. 연 19.5%의 수익률 전망을 홍보하고 있다. [자료: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우리나라 최초의 펀드는 1970년 5월 20일 한국투자개발공사(77년 증권감독원과 대한투자신탁으로 분리)가 설정한 1억원 규모의 ‘안정성장 증권투자신탁 1월호’다. 수익률은 당시 은행 정기예금 금리(연 22.8%)보다 높은 연 26%. 그 덕에 71년 5월에 1억원, 72년 2월에 1억원이 추가로 설정됐다. 이 펀드는 지금은 대한투자신탁을 인수한 하나UBS자산운용이 운용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공사채형(채권형) 펀드 위주로 판매됐다. 국내 최초의 투자신탁 전업회사로 74년 출범한 한국투자신탁이 선보인 공사채형 펀드는 연 19%의 수익률을 올리며 시장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공사채형 펀드는 은행의 보통예금처럼 편리하게 통장 거래를 하면서 짧은 기간 동안 높은 수익을 얻는다는 인식을 심으면서 인기를 모았다.

75년 한국투자신탁이 ‘안정성장 주식투자신탁 5월호’를 설정하며 본격적인 주식형 펀드 시대가 열렸다. 76년 활황기가 이어지며 일반 주식형 펀드뿐만 아니라 ‘학생주식투자신탁’과 ‘재형주식투자신탁’도 설정된다. 77년 설립된 대한투자신탁이 ‘성장주식투자신탁’을 설정하며 78년 주식형 펀드 수탁액은 처음으로 1000억원을 넘어섰다.

1982~1989(아동기) 마음껏 대지를 달리다

1982년 설정된 장기성장주식신탁의 광고 팸플릿. 당시 주식형 펀드는 대부분 수익률 보장 상품이었다. [자료: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오일 쇼크로 경기침체가 심화되며 80년대 초반 주식형 펀드는 부진했다. 금리인하 조치로 인해 공사채형 펀드의 수익률이 낮아졌다. 그러나 이는 주식형 펀드엔 기회가 됐다.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주식형 펀드의 신상품 개발이 활발해진 것이다. 82년 주식형 펀드이면서도 수익률을 보장하는 ‘장기보장주식투자신탁’이 설정되며 수탁고가 늘어났다. 85년에는 재형주식투자신탁의 가입대상이 확대(월급여 40만원 이하에서 60만원 이하)되면서 1조120억원까지 규모가 커졌다.

때마침 주식시장도 86년부터 상승세로 돌아섰다. ‘개미군단’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며 주식시장의 대중화가 이뤄진 것도 이때다. 그 덕에 펀드시장도 성장국면에 접어들었다. 당시 주식형 펀드는 정부가 정한 설정 한도 내에서 판매가 가능해 신상품이 출시될 때마다 객장에는 고객이 장사진을 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85년 말 113만 명이던 펀드 가입자는 88년 말 306만 명으로 늘어났다. 85년 9000억원에 불과했던 주식형 펀드 설정액도 90년 9조9000억원으로 급증했다.

거칠 것 없이 치솟던 주가는 89년 3월 20일 1000포인트를 돌파하고 4월 1일 최고점(1007.77)을 찍었다. 85년 말 164.4였던 종합주가지수가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간 것이다. 펀드 시장도 활황을 맞았다.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주식시장은 92년 500포인트대로 내려앉을 때까지 3년의 시련기를 맞았다. 85∼88년 과도하게 발행한 주식 물량의 부담 때문이었다.

89년 9월부터 12월까지 주가가 140포인트 이상 하락하자 시장은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정부는 사상 초유의 증시 부양책을 내놓는다. 한국은행의 통화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투신사가 주식을 무제한으로 매입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12·12 증시안정화 조치’다. 과도한 주식 공급으로 주가가 하락하자 그것을 투신사의 매수로 받아내겠다는 것이다.

주가는 연말까지 급상승했다. 세 개 투신이 사들인 주식은 2조7697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시장과 역행하며 펀드산업의 기반을 흔들고 투신사의 부실을 초래했다. 당시 투신은 920포인트 안팎에서 주식을 사들였지만 이후 주가하락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주식 매입 자금에 따른 이자 비용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990~2000(청소년기) 질풍노도에 휘말리다

1990년 등장한 보장형 펀드. 정기예금 금리(10%)를 보장하며 주가 등락에 따른 수익률도 추구할 수 있는 상품으로 투신사 부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은 한국투자신탁에서 판매한 ‘석류보장’ 펀드 광고 팸플릿.[자료: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89년 ‘12·12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1월 900선이 무너졌다. 90년 5월 정부는 증권사(2조원)와 은행(5000억원)·보험(5000억원)과 상장사(1조원)를 동원해 4조원의 증시안정기금을 급조한 뒤 연말까지 3조원의 주식 매입에 나섰다. 하지만 9월 주가는 다시 곤두박질치고 정부는 또다시 특단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보장형 펀드였다. 90년 9월 20일 정부는 투신사에 2조6000억원 규모의 보장형 펀드 판매를 허용했다. 정기예금 금리(연 10%) 수준의 수익을 보장해주는 펀드로 3년간 복리로 계산하면 33.16%의 수익을 얻는 구조였다. 만기 3년으로 중도 환매가 금지되며, 펀드에 모인 돈의 80% 이상을 주식에 투자하도록 했다. 주식형 펀드인데도 원리금을 보장해주는 상품으로, 운용 결과에 따라 수익률이 결정되는 실적배당 원칙을 무시한 상품이었다. 세 개 투신은 7000억원씩, 지방 5개 투신은 1000억원씩 설정 한도를 배정받았다. ‘석류보장’(한투), ‘대한보장’(대투), ‘국민보장’(국투) 등이 당시 판매되던 보장형 펀드다. 하지만 만기 당시 보장 수익률을 충족한 것은 33개 중 2개밖에 되지 않아 투신사가 그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한국투자신탁주식회사가 발행한 재형증권투자저축 증서. [자료: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주식시장의 약세로 손실이 커지는 가운데 92년 5월 한남투신의 부도설이 시장에 떠돌며 열흘 사이에 투신에선 4000억원의 자금이 빠져나갔다. 정부는 5월 27일 ‘투신정상화 방안’을 발표하고, 3조2000억원의 자금을 저리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 조치 이후 투신사는 연말까지 시장에서 2조7692억원 규모의 순매수를 기록했지만 이후 주가가 하락하며 엄청난 이자 부담에 시달렸다. 이후 세 개 투신은 모두 자본잠식 상태의 부실회사로 전락했다.

투신의 역사에서 97~99년은 천국과 지옥을 오간 시기였다. 97년 외환위기는 투신사에 직격탄을 날려 일부 지방 투신사가 영업정지를 당하는 등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98년 10월 주가지수가 1000포인트를 넘으며 다시 주식형 펀드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99년 3월 ‘바이코리아 펀드’ 열풍은 그 정점이었다. 국민투신이 변신한 현대투신이 ‘한국경제를 확신합니다’라는 구호를 내걸며 출시한 이 펀드에 4개월 만에 12조원의 돈이 몰렸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뮤추얼 펀드도 이러한 열기에 가세하며 펀드 열풍이 주식시장을 뒤덮었다. 98년 말 8조원에 불과하던 주식형 펀드의 수탁고는 1년 뒤에 56조원으로 폭증했다.

1970년 이후 수익증권 저축 통장.[자료: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8~10월 대우사태가 터지며 투자자들은 환매 대열에 합류했고, 환매대금 마련을 위해 채권 처분에 나서자 채권시장이 마비됐다. 정부는 대우채 편입 펀드 환매 제한 조치를 내놨고, 투신사는 1조∼2조원에 달하는 대우채 관련 손실을 떠안았다. 악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0년 정보기술(IT) 버블이 꺼지면서 주식시장이 침체하며 펀드의 수익률도 곤두박질쳤다. 바이코리아 펀드는 수익률이 -70%에 이를 정도였다.

2001~현재 자산관리의 중심에 서다

2001년 미국의 9·11테러는 세계 증권시장을 뒤흔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큰 충격을 겪은 한국 주식시장은 정부의 경기부양책과 2002년 월드컵으로 인한 내수 호황으로 성장했지만 이듬해 신용카드사 부실로 다시 조정을 받았다.

2004년에 처음 도입된 적립식 펀드에 돈이 몰리면서 주가가 상승하고 이후 적립식 펀드 열풍에 힘입어 대규모 자금이 주식시장에 유입됐다. 2006년과 2007년은 ‘인사이트 펀드’로 대표되는 ‘미래에셋 열풍’이 펀드 시장을 지배했다. 세계경제의 호황 속에서 유동성이 풍부해지자 개인투자자들이 주식 및 펀드 등 투자상품에 몰리며 펀드 광풍이 시장에 몰아친 것이다. 해외 신흥국에 투자한 해외 펀드가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자 너도나도 펀드 투자에 나섰다.

하지만 2007년 10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가 표면화하고,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에서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로 수익률이 반 토막 난 펀드가 속출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였다. 금융위기로 주가가 892.16포인트까지 하락했지만 2009년엔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최근에는 펀드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자산관리 서비스가 등장해 투자문화의 선진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3투신’을 아시나요

정부는 기업들이 발행하는 회사채와 주식을 사들이는 역할을 맡기려고 투자신탁회사를 설립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의 투자신탁사는 한국투자신탁과 대한투자신탁·국민투자신탁의 ‘3투신’과 지방의 5개 투신(한일·중앙·한남·동양·제일투신)에 불과했다. 특히 3투신은 80~90년대에 업계 1~3위를 휩쓸며 한국 증시를 좌지우지했다.

1974년 국내 최초의 투자신탁전업회사로 출범한 한국투자신탁은 5개 시중은행과 27개 증권회사의 출자로 이뤄졌다. 대한투자신탁은 77년 한국투자개발공사가 증권감독원으로 해체되면서 공사의 증권투자신탁업무를 물려받아 탄생했다. 1982년 설립된 국민투자신탁은 97년에 현대그룹 계열사로 편입돼 현대투자신탁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한편 정부는 89년 금융의 수도권 집중을 해소하기 위해 지방에 금융회사 신설을 허용했다. 그해 11~12월 인천에 한일(신세기), 대전에 중앙투신, 광주에 한남투신, 대구에 동양투신, 부산에 제일투신이 자본금 300억원 규모로 설립됐다.

하지만 투신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89년 주가하락을 막기 위해 실시된 사상 초유의 ‘12·12 조치’ 이후 3투신의 부실화가 심해지며 92년 자본금 전액이 잠식된 부실회사가 됐다. 97년 외환위기는 투신에도 타격을 미쳐 일부 지방 투신사가 영업정지를 당했다. 99년은 투신사의 영욕이 엇갈리는 해다. 현대투신의 ‘바이코리아 펀드’ 열풍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 듯했지만 대우그룹 몰락과 함께 대우채 투자손실이 급증하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3투신은 공적자금 투입과 구조조정 등을 겪으며 국민투자신탁이 가장 먼저 2004년 미국 푸르덴셜에 인수됐다. 한국투자신탁은 2005년 동원금융지주에 인수됐으며, 그해 6월 동원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이 합병했다. 대한투자신탁도 2005년 하나은행에 매각돼 하나대투증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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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