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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⑤ 용곡동

천안시 용곡동은 도심 내에서도 시골풍경이 그려지는 마을이다. 오래된 둥구나무 주변에 주민들이 모여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집안의 경사를 서로 축하해 주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서로 돕고 걱정과 아픔을 함께 나눈다. 매년 칠석날이면 동네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시골정서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마을이기도 하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토박이 마을주민은 크게 줄었지만 아직은 주민들간의 정(情)이 넘치는 곳이다.

글=김정규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용곡동은

천안 도시지역의 남쪽 끝에 있다. 주위에 청당동(淸堂洞), 청수동(淸水洞), 다가동(多可洞) 및 신방동(新芳洞)과 접한다. 원래 천안군 군남면(郡南面)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군남면의 두대동(斗垈洞), 쌍용리, 와석(臥石) 일원과 하리면(下里面) 다가리(多可里)의 일부를 합쳐서 천안군 환성면(歡城面) 용곡리가 되었다. 이곳이 예전에는 환성면소재지였다고 한다. 1963년 천안읍과 환성면이 통합하여 천안시로 승격되면서 용곡동으로 개칭, 신용동(新龍洞) 관할의 법정동이 됐다. 2007년 5월 신용동이 폐지되고, 행정동으로 시설된 일봉동과 신방동이 나누어 관할하게 됐다.

이곳은 일봉산 자락의 넓은 들에 있는 농촌마을이다. 천안시 도시지역의 동부를 관류하는 천안천이 이곳으로 흘러 봉강(逢江)과 합류하며, 마을 주위에 1번국도·21번국도와 장항선(長項線)이 있다. 천안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일봉산에 일봉산체육공원이 있고, 역내에 천안수도사업소·용곡초등학교·용소초등학교·용곡중학교가 있고, 조선 영조 때의 학자 홍양호묘(洪良浩墓; 충남문화재자료 133호)·조선 숙종 때의 효자 정계인(鄭戒仁)의 효자정문이 있다. 또한 눈들·용소골·두텃골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천안시 용곡동은 아직 시골의 정서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청수지구에서 용곡동을 바라봤다. 아파트 단지가 꽉 들어차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조영회 기자]
용곡동은 요즘 공사가 한창이다. 지역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거점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주거기능 중심도시로 주목 받고 있는 것이다. 또 인근에 청당·신방통정 개발지역과 연계, 향후 발전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인근 역사 건립에 따른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일봉산·홍양호묘

일봉산에 있는 홍양호묘.
일봉산(日峰山)은 눈들마을의 뒷산이며 천안의 명산이다. 최근에 체육시설을 갖추어 시민체육공원이 되었고 일봉산악회원들에 의하여 정상에 각정이 만들어졌고 매일 아침이면 수 백 명의 야호부대원이 아침등산을 즐기고 있다. 정상부분에는 언제 쌓여진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토성이 있어 천안을 수비하는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토성의 일부가 남아있고 8각정이 세워진 곳은 토성의 돈대(敦 臺)로 망루(望樓)와 같은 구실을 하던 곳이다. 천안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며 해를 맞는 산이라고 하여 일봉산이다.

홍양호묘(洪良浩墓)는 일봉산 남쪽 8각정 아래에 있다. 홍양호는 조선영조때의 석학으로 1729년(경종 4)에 낳아서 1802년(순조 2)에 졸했다. 자(字)는 한사(漢師)고 호(號)는 이계(耳溪) 익호(謚號)는 문헌공(文獻公)이다. 본관(本貫)은 풍산(豊山)으로 벼슬이 이조판서에 오르고 홍문관 대제학을 겸했다. 영조실록을 편찬하고 『역상(易象) 』, 『만물원시북한풍토기(萬物原始北寒風土記)』 등 여러 편의 저서가 있으며 문집(文集) 49권을 남겼다. 서예에도 뛰어나 수원북문(水原北門)의 상량문을 썼다. 박학이라 영조도 의문 나는 게 있으면 모든 것을 홍양호에게 물어서 시행했다고 한다.

정계인의 효자정문

정계인(鄭戒仁)은 용곡동 두텃골 출생으로 조선 숙종 때 사람이다. 평소에도 효행이 지극했다 하며 동리에서도 그의 선행에 칭찬이 자자했다. 어느 날 밤 도둑이 침입하여 재물을 빼앗고 반항하는 그의 부친을 칼을 뽑아 죽이려 하였다. 이때 계인이 뛰어들어 몸으로 자기 부친을 가리고 살려 달라고 손발이 닳도록 애원하였다. 그러나 도둑들은 계인의 아버지를 무수히 난자하면서도 계인의 애원에 감동하여 부자를 놓아 주었다. 그후 계인은 아버지의 병환에 자기의 손가락을 깨물어 숨이 끊어지는 아버지의 목숨을 연장시켜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이러한 사실을 동민들은 감사에게 적어 올려 감사는 다른 사람들도 본받게 효자문을 세우라고 명하여 오늘날까지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전해지고 있다.

칠월칠석 마을주민 한자리에

매년 칠석날이 되면 주민들은 둥구나무에 앞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부녀회에서 음식을 만들어 마을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주민들은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한다. 꽹과리를 치고 주민들이 막걸리를 주고 받으며 여흥을 즐기기도 한다. 마을주민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도 이 행사를 보기 위해 모여든다. 도심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용곡동 산 증인 방태환, 박인구씨

추억 어린 둥구나무, 한번 보시겠어요


방태환
도시에 가면 ‘토박이’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인구 유입, 유출이 많아 토박이란 단어가 생소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용곡동에는 적지 않은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 아직은 시골냄새가 풍기는 곳이다.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는 방태환(81·왼쪽)씨와 마을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박인구(76)씨의 얘기를 들어봤다. 박씨는 45년쯤 전 경북 경주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Q 용곡동은 어떤 마을인가.

정확하진 않지만 40여 년 전에는 이곳은 천안군 환성면의 면소재지로 천안에서는 제법 규모가 큰 동네였다. 당시 360호 정도 되는 집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원주민들이 50여 가구밖에 남지 않았다. 눈들마을이라 불리는 이곳 뒤에는 일봉산이 있어 살기 좋은 곳이다. 또 수 백 년 된 둥구나무는 마을사람들의 쉼터이자 자랑거리다.

Q 둥구나무가 무엇인지.

둥구나무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큰 나무다.(둥구나무의 사전적 의미는 ‘크고 오래된 정자나무’다.) 마을 사람들 얘기로는 한 700년 정도(기록으로는 200년) 됐다고 한다. 어릴 때 아이들이 나무를 타고 놀며, 떨어져 다치기도 한 추억이 많은 곳이다. 둥구나무 옆에는 큰 냇가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물장구치며 멱 감고 놀았다. 60-70년 전 당시에는 물이 많고 모래사장도 있었으며, 손바닥보다 큰 물고기도 많았다. 그런데 요즘 아파트 개발 때문에 둥구나무가 고사할 위기여서 주민들이 크게 안타까워하고 있다.

Q 마을의 자랑거리.

박인구
마을에는 홍양호묘, 정계인의 효자정문 등 유명한 것이 많다. 또 칠석날 지내는 제사도 재밌는 동네행사다. 이날에는 동네 주민들이 둥구나무에 다 모여 제사를 지내고, 꽹과리를 치며 논다. 또 다른 곳에서 오는 사람들에게도 다 대접하며 함께 어울린다. 이때 동네의 ‘어른’인 통장이 제일 먼저 절을 하고, 다음에 경로회장 등이 이어 제를 올린다.(나이와 상관없이 마을 통장을 제일 어른으로 대접한다고 한다.) 추억을 되살리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오기도 한다.

Q 또 다른 추억이 있다면.

마을 주민들이 대부분 피난을 갔다. 멀리는 지리산까지 가고, 인근 풍세.광덕 등 산속으로 숨기도 했다. 인민군들이 마을주민들의 소·돼지를 잡아먹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용곡동 유래

전형적인 한국 농촌의 모습 갖춰


용곡동에 위치한 만수사. 아래는 일봉산 등산로. [조영회 기자]
일봉산 아래에 동서로 길게 펼쳐진 동이다. 동의 뒤쪽에는 높은 산이 가로막아 북풍을 막아주고 앞에는 큰 내가 굽어 흘러가며 주변에는 넓은 들이 펼쳐져서 전형적인 한국농촌의 모습을 갖춘 동이다. 천안시내에서 흐르는 천안천(天安川)이 이곳으로 흘러 봉강(逢江)에 합쳐지고 남쪽으로 멀리 광덕산을 바라보면서 터지고 산과 내가 어우러진 좋은 고장이다.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두텃골 쌍룡리눈들 하리면(下里面)의 다가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곡이라 하여 환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천안시에 편입되었다. 용소(龍沼)의 용자와 후대곡(厚垈谷)의 곡자를 따서 용곡동이라 하였다.

눈들(와석동(臥石洞):누은들) 일봉산 남쪽 산아래에 펼쳐진 마을이다. 일봉산의 서편 기슭에 둥글고 긴돌 2개가 가로 누어있어 돌이 누어있다고 하여 누은돌이 변하여 눈들이 되었다. ※ 누은돌은(臥石)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 나타난 선돌(立石, Menhir)이 있을 듯 하나 마을이 이루어진 뒤에 모두 없어진 듯하다.

일봉산 등산로. [조영회 기자]
용곡천(눈들내) 태조산을 수원으로 한 유량천과 노태산을 수원으로 한 봉명천이 남산뒤에서 합류되어 용곡천에 이르러 큰 내가 된다. 우리나라 강천(江川)이 한 구비 돌 때 마다 한 마을씩 남기는 것이 상례인데 한구비 도는데 눈들부락을 형성하고 두 번 돌아 두텃골을 만들고 다시 돌아 정산터를 이루었다. 내 옆으로는 범람원을 이루어 넓은 들을 형성하였고 천안을 대표하는 곡창지대를 만들었다.(천안을 대표하는 내다)

눈들방죽 1930년대에 용곡동 눈들부락의 남쪽에 사금채취선(砂金採取船)이 들어와 사금을 채취할 때 파놓은 웅덩이에 물이 고여서 많은 방죽을 만들어 놓았다. 1940년 초까지 약 50여 개의 웅덩이가 있어 웅덩이의 군락을 이루었는데 해방 후에 모두 메우고 농지로 활용하면서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 ※ 한때는 천안 낚시꾼들의 낚시터로 각광을 받았다.

두텃골(厚垈谷) 일봉산 서남쪽에 남향받이의 아늑한 마을 두텃골을 한자로 표현하면 후대곡(厚垈谷) 또는 후기곡(厚基谷)이다. 이 마을에 내려오는 설에 따르면 두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인심이 좋고 사람살기가 좋아서 두텃골이라 하였고 또 한가지는 마을의 생김새가 높고 낮은 턱이 있어 두턱이 졌다고 두턱골이 변해서 두텃골이 되었다는 내력이 있으나 세번째의 설이 가장 알맞은 설 같다. 셋째는 옛날 이 마을이 만들어질 때 鄭氏 두 사람이 처음으로 집터를 마련하여 살았다고 두터골(二垈谷)이 변음되어 두텃골이 되었다고 전한다.

용소골(龍沼谷) 눈들마을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 지금은 경부선 철도변의 마을이다. 본래는 눈들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최근에는 마을이 커져서 눈들과 붙어 있다. 옛날 이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 속에 용(龍)이 살았다고 용소골이다.

장고개(場峙) 용곡동의 눈들마을에서 천안시내로 나오는 낮은고개. 지금은 경부선 철도가 고개아래에 있고 고개의 끝쪽은 다가동과의 경계다. 고개를 넘게 되면 바로 내를 건너게 되고 내 건너에 있는 시장을 보러 다니기 때문에 장고개로 불려졌다.

미역공장 사직동의 남산에서 장고개로 들어서는 곳. 마을의 일부는 다가동에 속하고 일부는 용곡동에 속한다. 1940년대 초에 이곳에서 생미역을 말려서 시장에 내는 공장이 있었다고 미역공장이라고 부른다.

앞 들 눈들동리 앞에 펼쳐진 들. 들이 넓어서 남쪽의 끝은 풍세면에 연속 되었고 서쪽은 신방동의 신흥리에 닿았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초까지 사금을 채취하는 사금채취선(금배)이 수 십 개의 웅덩이를 파 놓았으나 1945년 해방 후에 모두 메워서 없어지고 지금은 들이 되었다.

참새골 일봉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지금의 수도 저수탱크가 있는 곳. 예부터 참새들이 무리를 지어 살았다고 참새골이다.

새말고개 눈들동리에서 새말로 넘어가는 고개. 일봉산 서쪽에 있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넘나드는 고개였으나 지금은 새 도로가 마을 앞에 생기면서 한적한 고개가 되었다.



■ 용곡동 현황

면적 2.22 ㎢

가구(인구) 5208(13071)

행정구역 23개 통 174개 반(일봉동 전체)


■ 지역특성

교육기관 2개 초등학교(용곡초, 용소초),

1개 중학교(용곡중)

기타시설 천안수도사업소

■ 자생단체 주요 인사

유흥선(주민자치위원장)
이영우(방위협의회장)
신성철(체육회부회장)
이창덕(새마을지도자회장)
김시종(통장협의회장)
박복순(새마을부녀회장)
정웅환(바르게살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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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