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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살아 집에 올 수 있을까, 하며 집을 나선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지난 3월 F-5 사고로 순직한 오충현 대령, 유서가 된 18년 전 일기장

18년 전 순직한 동료의 장례식 후 심정을 기록한 오 대령의 일기. 자신도 사고가 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남은 가족과 동료, 부대에 유언처럼 세세한 당부를 남겼다. 다음은 기사 전문.



1992년 12월 9~11일(수~금) 엄청 추움 후 Rain Snow (동료의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며 몇 가지 생각난 것이 있었다. 먼저, 내가 죽는다면 우리 가족, 부모 형제, 아내와 자식들은 아들과 남편, 아버지로서보다 훌륭한 군인으로서의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담담하고 절제된 행동을 보였으면 한다. 그다음은 장례식을 부대장으로 하고 유족들은 부대에 최소한의 피해만 줄 수 있도록 절차 및 요구사항을 줄여야 한다. 또, 각종 위로금의 일부를 떼어서 반드시 부대 및 해당 대대에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한다. 진정된 후에 감사했다는 편지를 유족의 이름으로 부대장에게 보내면 좋겠다. 더욱이, 경건하고 신성한 아들의 죽음을 맞이하여 돈 문제로 마찰을 빚는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돈으로 해서 대의를 그르치지 말아야겠다. 장례 도중이나 그 이후라도 내가 부모의 자식이라고만 여기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 조국이 나를 위해 부대장을 치르는 것은 나를 조국의 아들로 생각해서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이 말을 명심하고 가족의 슬픔만 생각하고서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갖추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나로 인해 조국의 재산과 군의 사기를 실추하였음을 깊이 사과할 줄 알아야겠다. 나는 오늘까지의 모든 일을 보고 직접 행동하면서 나의 위치와 임무가 정말 진정으로 중요하고 막중함을 느꼈고 조종사이기에 부대에서 이렇게 극진히 대하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이 조종사임을 깊이 감사하며, 나는 어디서 어떻게 죽더라도 억울하거나 한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럽고 떳떳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군인은 오직 충성, 이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세상이 변하고 타락해도 군인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영원한 연인 조국을 위해서 오로지 희생만을 보여야 한다. 결코 우리의 조국, 그의 사랑은 배반치 않고 역시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고 오충현 대령과 박소영씨의 일기장 중 일부>







<1> 사고 이틀 전 부대 안 교회에서 찍은 마지막 가족 사진. <2> 딸 유빈양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쓴 시. 오 대령은 이 시를 좋아해 냉장고에 붙여두고 시간 날 때마다 바라봤다. <3> 오 대령의 영정, 생전에 사용하던 빨간 마후라와 모자, 사고 현장에서 찾은 타다남은 조종복 조각이 거실 한 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날 아침도 평소와 같았다. 새벽에 일어난 남편은 아내가 차려 준 아침을 먹었다. 홍삼 진액도 빼놓지 않았다. 6시가 조금 지나 남편이 집을 나섰다. 아내는 언제나처럼 현관문 앞에서 남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뽀뽀했다. “잘 다녀와요.” 계단을 내려가던 남편이 잠시 멈춰 아내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남편 고 오충현(43ㆍ공사 38기) 대령은 그날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3월 2일 공군 강릉기지에서 이륙한 F-5 전투기 2대가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인근에 추락했다. 이 사고로 전투기에 탑승했던 오충현 대령, 어민혁 소령, 최보람 대위가 순직했다. 오 대령은 공군 제18전투비행단 105비행대대장으로 지난해 12월 1일 부임했다. 비행시간 총 2792시간, 공군사관학교 38기인 그는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베테랑 조종사였다. 오 대령의 선후배·동료들은 하나같이 ‘진짜 군인, 군인다운 군인’이었다며 너무 아까운 분을 잃었다고 말했다.



사고 3주 후인 3월 22일과, 3개월이 지난 6월 2일 오 대령의 부인 박소영(43)씨를 만났다. 두 번의 인터뷰 사이 천안함 침몰사건이 발생했고 고 오 대령 사고의 진상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사고 직후나 3개월이 지난 지금이나 박씨는 여전히 꿋꿋한 모습을 잃지 않고 담담하게 오 대령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박씨를 처음 만난 곳은 강릉 18전투비행단 내 관사에서다. 집안 거실에는 오 대령의 영정과 빨간 마후라, 평소 사용하던 공책과 모자, 사고 현장에서 수거한 타다 남은 조종복 조각이 거실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사진). 박씨는 찬송가를 틀어 놓고 성경을 읽고 있었다. 그는 “그날(3월 2일) 아침 나를 보고 웃어 준 게 마지막일 줄은…”이라며 입을 열었다. “남편이 아무 말 없이 떠나 버리고 나니 내가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아무 생각도 안 났죠.” 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뒤 박씨는 무작정 부대 안에 있는 교회로 갔다. “집에는 도저히 못 있겠더라고요. 사람들 신발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떨려 견딜 수 없었죠.” 교회로 간 박씨는 계속해서 기도했다. “제가 공군 생활 1~2년 한 게 아닌데 왜 모르겠어요. 절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그런데 정작 내가 당하니까 혹시나… 설마…설마…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92년 결혼 뒤 부부가 함께 일기 써

1992년 10월 20일의 일기로 시작하는 일기장의 첫 페이지. 해와 구름을 그림으로 그려 날씨를 표시했다.
박씨를 다시 일어서게 한 것은 한 권의 일기장이었다. 그는 3월 6일 치러진 장례식을 위해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18년 전(1992년) 남편과 함께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92년 5월 결혼한 부부의 일기는 그해 10월 20일 시작해 96년 2월 4일까지 이어진다. “어느 날 남편이 일기장을 같이 쓰자고 했어요. 그때부터 번갈아 가면서 일기장을 채워 나갔죠.” 특히 92년 12월 9일 남편이 쓴 일기는 박씨에게 큰 힘이 됐다. 당시 오 대령은 동료가 비행 훈련 도중 순직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만약 자신도 같은 사고를 당할 경우를 대비해 가족과 동료, 부대에 남기는 글을 썼다. 18년 전에는 일기를 보고 남편에게 “이거 완전 유서 아냐. 뭐 이런 걸 다 쓰느냐”고 화를 냈다고 한다. “화를 내긴 했지만 제발 이걸 활용할 일은 안 왔으면 했는데….” 사고 후 일기를 펼쳐 본 박씨는 “하도 오래전이라 잊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이런 일이 생길 것을 미리 알고 써 놓은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무슨 일을 하든 남편만 따라가면 됐어요. 그런데 남편이 아무 말 없이 한순간 갑자기 간 거잖아요. 다시는 나한테 어떻게 하라고 얘길 못해 주는데 이 일기장이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 주고 있어요.” 사고 후 박씨는 일기장을 보면서 남편과 대화한다고 했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부대 안에서도 후유증이 오래가요. 여러 가지 문제로 많은 사람이 힘들어하지요.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남편이 동료들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고 군인으로서 명예를 지키고 싶어 이 글을 쓴 것 같아요.” 실제로 박씨는 남편이 일기장에 남긴 말을 따라 지난 5월 말 부대에 300만원의 성금을 전달했다. “일기장에 보면 부대에 감사를 표시하라는 말이 나와요. 그게 아니었더라도 남편의 동료·후배들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보답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단 부대에 성금을 맡겼죠.”



고 오 대령과 박씨는 87년 사관학교 생도수련회에서 처음 만나 몇 년간의 연애 후 92년 결혼했다. “우리 아버지도 공군 관제장교셨어요. 어릴 때부터 부대 안에서 살았죠. 그래서 가끔 남편한테 군대 생활은 내가 당신보다 더 오래됐다고, 내가 선배라고 말하곤 했죠.” 박씨가 공군 조종사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그의 아버지는 “왜 군인이냐. 그것도 왜 하필 조종사냐”며 물었다. 조종사의 힘든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의 걱정이었다. “그래도 그 사람이 좋은 걸 어떡해요. 결국 결혼했죠.”



날아다니는 곤충 잡지 않는 조종사 부부

결혼 초 오 대령은 집에 파리가 들어와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왜 안 잡느냐고 하니 ‘날아다니는 모든 것은 신성하다’며 잡지 않고 창밖으로 내쫓았어요.” 처음엔 재밌다 생각하며 웃어넘기던 박씨 역시 몇 년이 지나자 자신도 날아다니는 곤충은 함부로 죽이지 않게 됐다. “공군 조종사의 아내로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버릇 같은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날씨를 확인하는 것도 그렇고요.” 오 대령 부부의 일기장에는 항상 그날의 날씨가 기록돼 있었다. 일기의 첫 문장도 대부분 날씨 이야기였다. “목숨이 걸린 일이잖아요…. 수년간 이렇게 지내다 보니 아침에 하늘을 보면 날씨가 어떨지 감이 와요.”



한 전직 공군 조종사의 부인은 “남편이 아침에 출근할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분 좋은 상태로 보내려 해요. 그 모습이 마지막일지 모르는데….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다툴 일이 있으면 주말까지 참곤 했죠”라고 말했다. 박씨는 “조종사들은 죽음과 함께 살아가요. 그걸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사는 거죠”라며 남편이 일기장에 썼던 문장을 보여 줬다. ‘오늘도 살아서 집에 올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집을 나선다’.



인터뷰 도중 20~30분마다 계속해서 비행기 이륙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였다. 박씨에게 소리 때문에 불편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우리 같은 조종사 가족들은 부대 안에서 비행기 소리가 안 나면 오히려 긴장되고 불안해요. 이륙하는 소리가 안 난다는 것은 사고가 났거나 뭔가 다른 문제가 생겼다는 걱정을 하게 만드는 일이거든요. 물론 우리도 처음에는 시끄러웠죠. 하지만 이제는 이 소리가 들려야 마음이 편안해요.”



그는 공군 비행장 소음과 관련해 얼마 전 동료 조종사 가족이 겪은 일을 들려줬다. 동료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지방의 공군기지인데 비행장 소음 때문에 주변 주민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동료 조종사의 아들이 기지 주변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어느 날 친구들이 하늘에 날아가는 전투기를 보고는 ‘저놈의 비행기 확 떨어져 버려라’라고 했대요. 박씨는 “애들이 뭘 알고 그랬겠어요. 어른들 얘기 듣고 그랬을 텐데…”라며 속상해했다.



사고 이틀 전 마지막 가족사진

박씨에게는 중2 딸과 고3 아들이 있다. 평소엔 가족 네 명이 모이기 힘들다. 항상 바쁜 남편과 대구에 있는 기숙학교에 다니는 아들 때문이다. 그런데 사고가 있기 이틀 전 2월 28일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였다. 몇 년 만에 가족사진도 찍었다(사진). “우리가 가족사진이 거의 없어요. 몇 년 만에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이게 마지막 사진이 됐네요.” 그날 오후 가족들은 야외로 나가 드럼통 위에 장작불로 고기를 구워 먹고 농구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얼마 만에 가족들이 모여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지 모르겠어요. 지나고 드는 생각이지만 하늘에서 우리 가족한테 마지막 시간을 준 것 같아요.”



박씨는 7월 대구로 이사해 자녀들과 함께 살 예정이다. 지난주 내내 이사할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2일 경기도 용인의 남동생 집에서 만난 박씨는 사고 후엔 오히려 아들과 딸이 엄마를 위로한다고 했다. “5월 9일이 결혼기념일이었어요. 정작 저는 잊고 있었는데 딸이 어떻게 기억했는지 케이크도 사고 동료 가족분들까지 초대해 깜짝 파티를 열어 주더라고요. 무척 감동했었죠. 애들뿐만 아니라 부대 안 동료 가족들, 교회분들이 저를 가만 놔두질 않으세요. 어떻게든 뭐라도 먹이려 하고 옆에 있어 주셔서 힘이 많이 돼요.”



4월 30일 공군은 오 대령 사고의 원인을 조종사의 ‘비행착각(vertigo:비행 중 조종사가 경험하는 착각현상)’으로 발표했다. “비행착각이란 단어는 조종사들끼리 쓰는 전문용어예요. 이 말이 아무 설명 없이 언론에 그대로 나가다 보니 조종사들 실수로 사고가 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상황에서 사고가 난 것이지 실수, 잘못이 아니에요”라며 “천안함 사건은 모든 언론이 달려들어 영웅이라고 하는데 우리 사건은 그냥 조용히 묻혀 버렸잖아요. 그마저 일부에선 조종사 잘못으로 사고가 났겠거니, 또 비행기 한 대 떨어졌구나 하고 여기는 상황이 참 서운하더라고요. 화도 많이 났죠.”



이어 그는 “사고라는 것이 없으면 좋겠지만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거잖아요. 앞으로 어딘가에서 또 사고가 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이번 일이 조용히 묻혀 버리거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미 간 사람한테 훈장이며 계급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후배들을 생각한다면 그냥 흐지부지되면 안 될 것 같아요. 군인들은 명예 하나로 살아요. 그 명예를 끝까지 지키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강릉용인=임현욱 기자 g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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