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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보복 악순환 끊고 새 시대 통합을 꾀하다

사도세자 사당 전남 무안군 남동리에 있는 사당이다. 마을 사람들의 꿈에 사도세자가 나타나 세웠다고 하는데 민간에서 세운 유일한 사당이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① 사도세자의 아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1776년 3월 10일. 영조가 승하한 지 5일 후였다. 왕세손 이산(李<7958>:정조)은 경희궁 자정문(資政門)을 나와 즉위식 장소인 숭정문(崇政門)으로 향했다. 사관은 정조가 영조의 죽음에 대해 “슬피 울부짖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가슴 치며 통곡했다”고 쓰고 있다. 영조와 정조는 여느 조손(祖孫)과 달랐다. 영조는 노론 벽파와 손잡고 사도세자를 죽였지만 손자만은 지켜주었다. 작은 외조부 홍인한(洪麟漢)은 넉 달 전인 영조 51년(1775) 11월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동궁은 세 가지 일을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가지론(三不可知論)을 제창해 세손의 즉위를 반대했다. 이는 노론의 공식 당론이었다.

사도세자 편지 경남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데라우치 문고’ 중 일부에 포함돼 있다. 일본 야마구치 현립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가 1996년 그중 일부가 경남대 박물관으로 환수됐다.
이때 영조가 순감군(巡監軍)의 수점권(受點權)을 세손에게 주고 또 대리청정까지 시키지 않았다면 국왕은 다른 인물이 되고 정조는 노론에 의해 죽었을 것이다. 종친(宗親)과 문무백관이 동서로 도열한 즉위식장에서 세손은 울부짖으며, “이는 선왕께서 앉으시던 어좌이다. 오늘 내가 이 어좌를 마주 대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라고 사양하다가 어좌에 올랐다. 즉위식을 마친 정조는 곧 면복(冕服)을 상복으로 갈아입고 “어둑새벽 이전의 잡범 중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라”는 대사령을 내렸다. 대개 대사령을 내리는 것으로 즉위식 일정은 끝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빈전(殯殿:선왕의 시신을 모신 전각) 밖으로 대신들을 부르라”고 명한 후 즉위일성을 내었다.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신 것이다.”

홍봉한 초상 혜경궁 홍씨의 부친이자 정조의 외조부인 홍봉한은 노론의 영수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조했다. 하지만 그는 정조의 즉위에 반대하지 않은 노론 시파에 속했다. 사진가 권태균
대신들은 경악했다. 즉위 일성으로 생부를 거론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인 후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이라는 ‘팔자흉언(八字凶言:여덟 자로 된 흉언)’을 유포시켜 세손도 제거하려 했다. 영조는 세손을 먼저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란 허물을 씻어주었다. 그럼에도 막상 세손의 즉위가 가까워지자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鄭厚謙)과 숙의 문씨의 오빠 문성국(文聖國),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그 오라비 김귀주 등이 즉위 방해에 나서고 노론 벽파 영수 홍인한이 가세했다. 이런 온갖 방해를 뚫고 왕위에 오른 세손의 즉위 일성이 ‘사도세자의 아들’이었으니 노론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15년 전 자신들이 뒤주 속에 넣어 죽인 사도세자의 모습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포했지만 과거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또한 사도세자 문제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것이 영조의 유훈이었다. 이를 어길 경우 노론은 선왕의 유훈을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정조는 과거지향의 정치로 나라를 거꾸로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대리청정하던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비정상적인 정치체제를 정상적 정치체제로 바꾸는 것이 조선과 그 자신을 위한 개혁이라고 생각했다.

정조는 즉위 직후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숭하고,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고쳤다. 그러나 “나는 오직 종천(終天)의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일 뿐, 옛적부터 제왕들이 시법(諡法)을 간여하려 한 것을 일찍이 그르다고 여겨 왔다”며 더 이상 생부에 대한 추도사업에 나설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노론의 의구심을 풀게 하려는 것이었다.

문제는 정조의 즉위를 저지하려 한 노론 벽파에 대한 처리였다. 이들은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이기도 했다. 홍인한·정후겸·김귀주 같은 인물이 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노론 벽파의 영수 홍인한을 처리하지 않고는 임금 노릇을 할 수 없었다.

정조는 일단 기다렸다.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가 먼저 성토하기를 기다린 것이다. 백관의 조그만 잘못도 규찰하는 삼사가 임금의 즉위 저지라는 대역죄에 침묵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정조가 아니라 노론이었다. 즉위 보름째 사헌부 대사헌 이계(李<6E8E>)가 청대(請對)해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을 탄핵했다. 정조는 정후겸을 경원부(慶源府)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홍인한에 대해서는 끝내 침묵했다. 침묵을 깬 것은 정조였다. 정조는 대사헌 이계를 포함한 삼사 전원을 문외출송(門外出送)했다. 정조는 “하찮은 정후겸에 대해서는 강도나 절도가 눈앞에서 발생한 것처럼 시급하게 토죄하면서 기세가 하늘에 닿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감히 나서는 자가 없다”고 비판했다. ‘기세가 하늘에 닿아 있는 자’는 홍인한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부승지 정이환(鄭履煥)이 “전하께서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이면서 동시에 온 나라가 반드시 주토(誅討:베어 죽임)해야 할 원수”라고 공격하고 나선 인물은 홍인한이 아니라 그의 형 홍봉한이었다. 정이환은 “홍봉한은 임오년의 역적이고 전하의 역적이라면서 ‘일물(一物)’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역사서에서도 들어 보지 못하던 것인데 홍봉한이 창졸간에 멋대로 올렸습니다”라고 공격했다. ‘일물’은 사도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를 뜻하는 것이었다. 혜경궁 홍씨의 부친 홍봉한은 노론 영수로서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했지만 정조의 즉위는 방해하지 않은 노론 시파였다. 반면 홍인한은 정조 즉위를 앞장서 방해한 노론 벽파였다. 정조는 홍봉한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한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는 혜경궁 홍씨의 생부였다.

“만일 봉조하(奉朝賀:홍봉한)에게 극률(極律:사형)을 내리게 되면 자궁(慈宮:혜경궁 홍씨)께서 불안해하시고, 자궁께서 불안해하시면 나 또한 불안하다.”

이런 와중에 영의정 김양택(金陽澤)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후겸 모자의 죄를 성토하면서 홍인한도 공격했다. 정조는 홍인한을 여산부(礪山府)로 귀양 보냈다. 6월 23일에는 홍문관 수찬 윤약연(尹若淵)이 상소를 올렸는데, ‘정후겸 모자와 추향이 다른 국가 쪽의 사람들(國邊人)’이란 표현을 써 큰 문제를 일으켰다. ‘국가 쪽의 사람들(國邊人)’은 충신을 뜻하는 것이었다. 정조가 윤약연을 불러 “국변인이란 누구를 가리킨 것인가”라고 캐묻자 윤약연은 “홍인한은 대리청정을 저해할 마음이 없었을 것이기에 ‘국변인’이라고 한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홍인한이 충신이란 주장이었다. 정조는 “홍인한이 감히 대책(大策:국왕의 즉위)을 저해하는 짓을 했으니 그의 죄가 어떠한 것이겠는가”라면서 윤약연을 의금부에 가두었다.

정조는 배후세력이 있다고 보았다. 정조는 친국에 나서 “반드시 지휘한 자와 참견한 자와 상의한 자가 있을 것이니 바른 대로 고하라”고 말했다. 윤약연은 몇 명의 이름을 대다가 “전부터 절친했던 인물은 홍상간(洪相簡)입니다”라고 자백했다. 정조는 드디어 거대한 배후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고 판단했다. 홍상간은 영조 때 승지 등을 역임한 노론 실세였는데 보다 중요한 것은 홍지해(洪趾海)의 아들이란 점이었다. 영조 때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역임한 홍지해는 홍계희(洪啓禧)의 아들이었다.

영조 47년(1771) 사망한 홍계희는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 중 한 명이었다. 사도세자 사건의 전말을 담은 조선 후기의 야사 현고기(玄皐記)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친정아버지 김한구, 숙의 문씨, 그리고 홍계희 등이 윤급(尹汲)의 종 나경언(羅景彦)을 시켜 사도세자를 대역(大逆)으로 고변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나경언이 사도세자를 대역으로 고변하던 영조 38년 5월 22일 영조실록은 “경기감사 홍계희가 때마침 입시하고 있다가 임금에게 호위하게 할 것을 권하니, 임금이 이에 성문 및 하궐(下闕)의 여러 문을 닫으라고 명했다”고 전하고 있다.

홍계희는 우연이 아니라 사전 계획에 따라 영조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입시한 것이었다. 이들이 주고받은 문서에는 정조의 즉위에 대해 ‘풍색(風色)이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에 비위(脾胃)를 안정시킬 수 없다’는 표현까지 있었다. 정조의 즉위에 구토가 난다는 뜻이었다. 정조는 윤약연과 홍지해를 극변으로 유배 보내고, 동생 홍찬해는 흑산도로 유배 보냈다. 황해도 관찰사 홍술해(洪述海)는 백성의 재산 4만 냥과 곡식 2500석을 착취한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정조의 감형으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드디어 삼사는 정후겸과 홍인한의 사형을 요구했고, 정조는 즉위년 7월 5일 “고금도의 죄인 홍인한과 경원부의 죄인 정후겸을 사사(賜死:사약을 내려 죽임)하라”고 명했다. 이로써 정조는 과거사 정리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새로운 시작에 불과했다. 섬으로 유배된 홍씨 일족들이 정조를 제거하기 위한 비상수단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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