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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경력의 서기원 Ⅱ

소설가 서기원
무슨 인연인지 기자는 오랜 세월 서기원과 늘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 기자가 태어나서 30년 동안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살고 있을 때 그는 인접한 삼청동에서 살았고, 기자가 가회동 생활을 청산하고 은평구 불광동으로 이사했을 때 그는 이웃 갈현동에서 살고 있었다. 1990년대에 다시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하니 서기원은 이미 그곳에 집을 지어 이사해 있었다. 게다가 비록 짧았던 몇 해지만 같은 직장에서 일하기도 했으니 그리 간단한 인연은 아니었던 셈이다. 나이가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대선배지만 그는 늘 기자를 살갑게 대했고 이런저런 일에 조언도 많이 해주었다. 꼭 그 인연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서기원의 인간과 문학에 대해서 기자는 많은 글을 썼다. 그가 서울신문 사장으로 재직 중일 때 ‘현대문학’의 청탁으로 서너 시간에 걸쳐 ‘문학 대담’을 나눈 적도 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69>

성격이 원만하고 소탈해서 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했지만 그 역시 사람들을 좋아했다. 낚시와 바둑, 골동품 감상 등 취미도 다양한 편이어서 그 방면에 함께 즐기는 친구들이 많았고, 문단의 알아주는 애주가여서 문인들의 술자리에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 은평구에 살던 문인들을 규합해 친목 모임인 ‘은평 클럽’을 만든 것도 그였다. 박연희, 이호철, 김시철, 성찬경, 황명, 박성룡 등과 최미나, 박기원, 구혜영, 김지연 등 여류 문인들이 멤버였다. 다소 젊은 층으로는 이근배, 김종해, 권오운 그리고 기자 등이 끼었다. 이 모임은 꽤 여러 해 동안 매달 한 차례씩 만나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세상만사가 늘 화제였다. 서기원이 서울신문 사장직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멤버 중의 박성룡은 서울신문 문화부 차장을 맡고 있었으나 정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누군가 박성룡의 문제를 꺼냈다. 생활 형편이 그리 넉넉지 못해 퇴직하게 되면 어려울 텐데 승급을 시켜 정년을 다만 몇 년이라도 연장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였다. 서기원은 못 들은 체 딴전을 피웠지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모양이다. 과연 얼마 뒤 박성룡은 부장대우 발령을 받았고, 물론 몇 년을 더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관계의 폭이 넓었던 것은 그의 성격이 원만하고 소탈했기 때문이었다. 72년 태완선 경제기획원 장관 때 실시하기 시작한 ‘대변인 제도’의 첫 대변인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은 경제부처 출입기자 시절부터 가까이 지낸 태완선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서였다. 그 뒤를 이은 남덕우 부총리도 서기원을 좋아해 계속 대변인 직을 맡겼다. 남덕우 부총리 시절 ‘대변인 제도’의 성공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각 부처 출입기자들로 하여금 ‘대변인의 업무능력과 인기도’를 가늠하는 투표를 실시케 한 결과 서기원이 압도적 1위를 차지한 것도 그의 사람됨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 인기투표의 결과가 참작돼 75년 말 취임한 최규하 국무총리는 서기원을 공보비서관으로 발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성격이 둥글둥글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에 있어서 그는 항상 원칙주의자였고, 옳다고 생각하면 밀어붙이는 저돌적인 면도 있었기에 부하들 가운데는 그를 경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어쨌거나 서기원은 KBS 사장직을 맡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92년 물러났다. 사태는 진정국면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스스로 사표를 던진 것이다. 그 뒤 90년대 중반부터 ‘문학의 해’ 조직위원장과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 회장직 등 문화예술 관련 업무를 잠깐씩 맡기도 했지만 다른 공직처럼 골치 아픈 자리는 아니었다. KBS 사장에서 물러났을 때 서기원은 ‘정말 날아갈 것같이 홀가분하다’며 이젠 정말 소설에 매달려야겠다고 되풀이해서 다짐했다. 그 다짐을 실천하듯 서기원은 90년대 중반부터 조선일보에 대원군의 일대기를 다룬 대하소설 ‘광화문’을 연재하면서 얼마 뒤에는 서울신문에도 새 연재를 시작했다.

하지만 60대 중반을 넘긴 나이로 두 편의 신문 소설을 연재한다는 것을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원고에 쫓기는 생활 속에서도 그는 매일 친구들을 만나고 술을 마셨다. 문단에서 서기원과 가장 친분이 두터웠던 김시철에 따르면 그 무렵 그는 매일 평균 너덧 병의 소주를 마셨다고 한다.

결국 건강을 해치게 되고 연재도 중단한 채 병고에 시달리다가 2005년 7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75세였다. 언론인으로서도, 관료로서도 뚜렷한 자취를 남긴 것은 틀림없지만 역시 그의 이름은 소설가로서 더 오래, 더 중요하게 기억될 것이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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