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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 5일장은 누군지 모르는 손님 초대하는 파티 같아

제주에서 서울까지 시장의 매력을 찾아 여행을 다녀온 다섯 사람. 왼쪽부터 안혜정·서진영·하연선·최은희·신아름씨. 각자 문화기획·카페운영·공간디자인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의 시장여행은 대개 주말을 틈타 1박2일씩의 여정으로 진행됐다. 신동연 기자
“강원도에서 먹은 각종 메밀 음식, 그중에도 메밀촌떡.” “난 제주도 오메기떡.” “제주도 오징어 튀김은 다른 데서 먹는 것과 차원이 달랐어요.” “난 전주 남부시장 쌍화차. 시장에서 파는 재료로 만든 건데 마침 으슬으슬한 날씨에 아주 좋았어요.” “부산깡통시장은 먹을 게 참 많아요. 팥죽 한 그릇이 2000원인데 배 터질 뻔했어요. 한 그릇 다 먹고 가려니까 할머니가 한 국자 더 주시고, 또 입가심해야 한다고 식혜까지 주고….”

제주에서 서울까지, 여성 5인의 재래시장 답사기

역시나 시장 얘기에 먹을거리가 빠질 수 없다. 그동안 시장에서 맛본 제일 맛있는 음식을 물었더니, 다섯 여자의 입에서 전국 각지의 온갖 주전부리 이름이 나왔다. 20~30대인 이들 다섯 사람은 여러 해째 언니 동생 하며 친구로 지내온 사이다. 문화기획·카페운영·공간디자인 등 하는 일은 조금씩 다른데, 지난해 이른 봄 두 달 남짓 주로 주말을 틈타 함께 전국의 시장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객에게 시장은 굳이 살 게 없더라도 한번쯤 들러보고 싶은 곳이다. 그런데 이들은 처음부터 시장을 목적지로 삼았다. 때로는 모두가, 때로는 시간 맞는 두 셋씩 대개 1박2일의 여정으로 도합 30곳쯤의 시장을 구경했다. 이 중 15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최근한국의 시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여성 5인이 펴낸 『한국의 시장』에는 제주 동문시장, 병천 아우내장터, 동해 북평장, 대구 서문시장 등 전국 15곳의 시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와 여행객을 위한 정보가 실려 있다. 사진은 수원 못골시장.
“여기 모인 사람들의 특징은 신기한 걸 발견하는 걸 좋아하는 것이에요. 카페에 가든, 영화를 보든 같은 데서 만나면 하게 되는 얘기가 대개 비슷하잖아요. 그런데 여행을 떠나면 일상에서 무관심하던 작은 것에도 영감을 받는 기회가 많아지죠. 만약 프랑스 파리에 처음 여행을 갔다면 모든 것이 신기하고,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겠죠. 우리 주변의 시장에서도 그렇게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다른 네 사람에게 이번 여행을 제안한 서진영(28)씨의 말이다.

도시에서 자란 그 또래들과 달리 서씨는 재래시장, 특히 시골의 5일장까지 애정이 깊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경북 의성의 면소재지에서 살았어요. 이번 책에 넣지는 못했지만 거기 안개면의 5일장이 유명해요. 어렸을 때 거기서 장사하는 분들이 다 엄마 친구, 아빠 친구였어요. 학교 끝나면 가방 맨 채 가서 놀고…. 저한테는 시장이 아주 편한 곳이죠. 그걸 친구들과 함께 느끼고 싶었어요.”

사실 서씨에게는 이번 시장 여행이 업무의 일환이다. ‘기분 좋은 QX’라는 문화컨설팅회사에서 최근까지 시장 관련 사업의 홍보를 맡아왔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도하는 이 사업은 ‘문전성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문화를 통해 전통시장을 활성화한다는 취지다. 시장의 매력을 알리려는 서씨의 제안에 합류한 다른 네 사람도 실은 넓게 보아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해왔다.

제주장서 본 꽃무늬 마스크 인상적
“대학 다닐 때부터 남대문, 동대문 시장을 일부러 다녔다”고 말하는 최은희(38)씨는 공간 디자이너다. 대형 마트나 시장의 공간 디자인 같은 일을 해왔다. “원자재 시장을 찾아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고, 새로운 색배합 같은 걸 찾는 게 제게는 익숙한 일이에요. 시장이 저한테는 아이디어 뱅크죠.” 현재 홍대 부근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하연선(32)씨도 본래는 공연과 관련된 일을 했다. “저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일식집을 했어요. 방학 때면 아버지 따라서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경매하는 걸 보곤 했죠. 시장을 다녀보면 뭐가 지금 제철인지, 좋은 재료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같은 걸 알 수 있어요. 지금 제 일(카페)에도 직접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죠.”

막내 격인 신아름(27)씨는 앞서 파티플래너로 일했다. “오히려 마트를 가면 갔지 시장을 원래 좋아하진 않았어요. 지저분하고, 앉을 데도 없고…그렇게 생각했는데 언니들과 시장을 다니면서 애정이 생겼어요. 요즘은 집에서 가까운 성남의 모란시장을 가서 이것저것 사곤 해요. 여행이 끝나니까 꼭 연애가 끝난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이처럼 장기와 개성이 제각각인 이들은 시장에 도착하면 흩어져 제각각의 방식으로 재미를 찾았다. 예컨대 카페 주인은 제철 재료나 지역 특산물 같은 먹을거리부터 눈길을 주고, 전직 파티플래너는 시장 상품의 디스플레이 방식에 주목하는 식이다. 공간 디자이너에게는 시장의 오래된 간판도 흥미진진했다. 지금은 흔히 보기 힘든 예전 활자체나 로고를 발견해 디자인 변천사를 짚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심사를 이들은 직접 찍어 책에 실은 사진으로 표현했다. 이런 사진들을 단초로 각 지역과 시장에 대한 정보와 느낀 바를 곁들였다.

“제주 민속5일장에는 꽃무늬 마스크가 참 많아요. 입만 가리는 게 아니라 목까지 가리거나, 아예 얼굴 전체를 눈만 빼고 가리는 것 등등. 하나같이 무늬가 참 예뻐요. 제주를 삼다의 섬이라고 하잖아요. (여자들이 밖에서 일할 때 쓰는) 이런 마스크도 바람 많고 여자 많은 제주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이런 얘기를 하는 안혜정(28)씨는 서진영씨처럼 문전성시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해왔다. 시장의 매력을 두 사람은 요즘 젊은이들에 익숙한 용어로 설명했다. 5일장을 파티에 비유하는 것이 한 예다. “벌교 5일장에 가면 할머니들이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서로 인사들을 하세요. 그 모습이 꼭 파티가 열리는 원리 같아요. 호스트가 초대를 하고, 누가 손님으로 올지는 모르지만 가보면 이렇게 아는 얼굴들을 만나게 되는 거죠.”(안혜정) “충북 음성장은 문화사거리라는 곳에서 열려요. 이렇게 길을 막고 장이 서도 되는 건지 물었더니 상인들이 그러시더라고요. 원래 장이 있던 자리에 길이 난 거라고. 시장은 (장소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날을 정해 사람을 초대하는 파티 같아요.”(서진영)

물론 이들이 시장이라는 파티에 순탄하게 참여한 것만은 아니다. 한산 모시장이 새벽 4시부터 열리는 줄 모르고 오전 9시쯤 도착한 적도 있다. 모시장은 이미 끝나고 일반 물품을 파는 장만 열리고 있어 결과적으로 이번 책에 소개하지 못했다. 또 사진을 찍을 때는 대개 미리 상대의 허락을 구하려 했지만 뜻밖에 혼쭐이 나기도 했다. 아직 첫 손님도 받지 못한 상태인 줄 모르고 사진을 청했던 경우다.

시장의 면면에 실망한 적도 있다. 지역색과 전통이 담뿍 밴 상품인데도 여느 공산품처럼 밋밋하게 포장된 모습을 발견했을 때가 그랬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은 대신 노하우도 늘었다. 서진영씨는 특히 시장사람들과 자연스레 말을 섞게 된 것을 꼽았다. “부산깡통시장 맞은편 국제시장에 가면 수제 젓가락 파는 분이 있어요. 서울에서 시장여행을 왔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어요. 안 그래도 사려던 것인데, 젓가락까지 선물로 주셨어요. 이후 여행 다닐 때마다 들고 다니면서 숙소에서 썼죠. 그분과 지금도 연락을 해요. 이런 관계가 생긴다는 게 참 신기해요.”

오감 자극하는 ‘오픈쿡’ 시장 음식
시장을 보는 이들의 눈은 시장이 생업의 무대인 상인들이나, 집 가까이에 시장이 있어 일상적으로 장을 보는 생활인들과는 좀 거리가 있다. 안혜정씨는 “문전성시 프로젝트 때문에 전통시장을 참 많이 다녀왔는데,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곧바로 마트에 간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동생이 부탁한 치즈케이크를 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기실 예전에 재래시장이 누리던 지위에 비하면 요즘 시장에서 현대인의 복잡다단한 주문을 다 해결하기는 힘에 부칠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시장의 문화 자체는 위력적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안씨는 “문전성시 프로젝트를 하면서 처음에는 시장에서 뭔가 문화적 요소를 발견해 결합하려고 했는데, 다녀보니까 시장 그 자체가 문화콘텐트”라고 말했다. “시장에 문화를 더한다기보다는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시장에서 문화적인 창의력을 얻고 자극을 받는 부분이 참 커요.”

공간 디자이너인 최은희씨는 “시장의 물건들은 맞춤형 디스플레이”라고도 지적했다. “대량생산된 상품이 아니라 가업으로 만들어온 상품을 그 특징을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이 그에 맞춰 진열하는 거죠. 그런 도움말을 들으러 시장을 찾기도 해요.” 시장의 먹을거리가 군침 도는 것에도 비결이 있다는 게 이들의 관찰이다. “레스토랑으로 치면 시장은 대부분 오픈쿡(조리 과정을 손님들이 볼 수 있게 하는 것)을 하잖아요. 만드는 걸 직접 보면서 더 오감이 자극되는 거죠.”

내친김에 이들은 문화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시장에 대한 인터뷰도 진행해 이번 책에 실었다. 구체적인 사연을 알고 인터뷰를 청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다들 시장에 대한 진한 기억과 애정을 들려줬다.

“디자이너 이상봉씨는 어머님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대요. 연기자 홍석천씨도 그렇고요. 사진작가 권영호씨나 영화감독 박재현씨는 시장에서 촬영을 했던 경험이 있었어요.” 서진영씨는 “우리가 시장에 대해 얘기하는 걸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서 인터뷰를 했던 것인데, 모두들 시장에 대해 공감대를 갖고 있더라”고 전했다.

이들은 시장여행의 재미와 요령을 이렇게도 표현했다. “시장으로 여행을 가면 효도를 할 수 있어요. 전통시장 어디나 택배가 발달해서 특산품을 바로 부모님한테 선물로 부칠 수 있거든요.” “맞아요. 엄마하고 할 얘기도 많아져요. 거기 가면 뭐가 맛있더라 하면서.” “시장에서 산 재료, 그곳의 특산물로 상을 차려 저녁에 숙소에서 파티를 열어보세요. 저희는 시간이 부족해서 대신 군것질을 아주 많이 했죠.” “여행 다니면서 싸운 적은 없지만 먹고 싶은 거 못 먹을까봐 신경전은 좀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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