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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판 인터넷, 산업혁명과 첨단 경영·금융을 낳다

“세계 철도 네트워크가 완성되면 인류는 한 가족이 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같은 신을 믿고 단일 법규 아래에서 살게 될 것이다.”

철도, 광산 갱도에서 뛰쳐나와 세계를 잇다

미국 ‘철도 황제’ 제임스 힐이 1890년대에 한 것으로 알려진 말이다. 그는 미국~캐나다 국경을 따라 동서횡단 철도인 그레이트노던철도를 건설했다. 대륙 간 철도를 뛰어넘어 환세계 철도라는 야망을 좇은 황제였다. 그에게 철도는 단순한 운송수단이 아니었다. 인간의 일상 생활과 사고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을 ‘신비로운 무엇’이었다. 전문가들이 ‘철도 환상(Railway Euphoria)’ 또는 ‘철도 열풍(Railway Mania)’이라고 부른 증후군이다.

철도의 시작은 미미했다. 광부들이 발명가였다. 그들은 레일 위에 마차를 올려놓고 말로 끌어 광물과 폐기물을 운반했다. 말의 힘에 의존한 철도는 영국 제임스 와트가 증기엔진을 개발한 1784년까지 광산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와트의 발명도 미완성이었다. 증기의 힘이 피스톤을 누르는 데만 사용돼 분당 회전수(RPM)가 20회밖에 되지 않았다. 엔진 자체 무게를 이기기에도 벅찼다. 이 결점은 19세기 초 두 명의 기술자가 해결했다. 영국 리처드 트레비딕과 미국의 올리버 에번스가 각자 피스톤 양쪽에 증기 힘을 걸어주는 엔진을 개발했다.

증기엔진이 개발됐다고 철도 퍼즐이 모두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 철도는 첨단기술의 집약체였다. 기계공학뿐 아니라 재료·토목 기술 등이 하나가 돼야 했다. 이런 복잡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맞춘 인물이 바로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이었다. 그는 1829년 영국 맨체스터~리버풀을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했다.

산업혁명을 이끈 기관차
초기 철도의 속도는 시속 30㎞ 안팎이었다. 요즘 눈으로 보면 느림보지만 수천 년 동안 걷기에 익숙한 그 시절 사람들에겐 광속으로 달리는 괴물이었다. 실제로 앤드루 잭슨은 1829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테네시주 내슈빌~수도 워싱턴 구간을 한 달 동안 달려야 했다. 그랬던 것이 1860년대 철도가 이어지자 3일이면 도착할 수 있게 됐다. 역마차·운하 등 이전 교통 수단보다 지형과 기후의 제약을 한결 쉽게 뛰어넘었다. 속도와 연결성이 몇 곱절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19세기 미 경제학자인 아서 해들리는 1886년에 쓴 『철도교통』이란 책에서 “운하시대 밀의 소비지역은 생산지로부터 300㎞ 이내였다”며 “하지만 철도 때문에 미국 밀 농가는 남미·인도·러시아 밀 생산업자와 치열하게 경쟁하게 됐다”고 말했다.

철도가 시공간을 좁혀준 덕분에 그 시절 경영자들은 물류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19세기 철도의 물류 비용을 역마차 등의 약 5%밖에 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싼 물류비는 거대 시장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한 나라 안에서 지역별로 쪼개져 있던 시장이 하나로 통합됐다. 대장간 수준이었던 산업체가 대량생산 체제로 바뀌었다. 철도 자체도 거대한 산업으로 바뀌었다. 레일·화차 제작과 석탄 채굴 등 철도 연관산업이 발전하면서 중공업이 태동했다.

해들리는 “시간과 공간 축소, 물류비용 감소, 시장 확대는 산업혁명의 배아”라며 “철도가 낳은 새로운 경제 생태계 속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자본+열망=환세계 철도
철도는 자본주의 소프트웨어도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우선 주식회사의 자본조달 방식이 질적으로 바뀌었다. 철도 건설에 투입되는 자금은 방대했다. 개인이나 한 가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16~17세기 원격지 무역회사보다 수십 배 많은 사람들을 투자자로 끌어들여야 철도 벤처가 가능했다. 주식 공모가 본격화했다. 투자자의 저변이 확대되면서 버블도 더 커졌다. 1840년대 이후 나라별로 부풀어 오른 철도 버블은 이전 네덜란드의 튤립 거품, 프랑스의 미시시피 버블이나 사우스시 투기 등보다 훨씬 컸다. 공모주 청약이라는 메커니즘을 타고 증권시장에 뛰어든 중산층 때문이었다.

19세기 중반 철도 거품의 주인공은 영국 ‘철도왕’ 조지 허드슨이었다. 그는 신기술 철도와 대중매체의 영향력을 결합시켰다. 당시 철도 부설로 신문배달 속도도 빨라졌다. 배달 가능 지역도 몇 곱절 커졌다. 요즘 인터넷 매체처럼 ‘철도신문’ ‘철도일보’ 같은 신문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허드슨은 이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철도 부설 계획을 홍보하고 대중의 공모참여를 부추겼다.

막대한 자본이 철도에 집중되자 철도왕 허드슨이나 철도 황제 힐 등의 야망도 거대해졌다. 바로 대륙 간 철도를 연결해 ‘환세계 철도망’을 부설하는 것이었다. 스페인에서 한국까지 이어지는 유라시아 철도, 북미와 남미를 관통하는 아메리카 종단 철도, 이집트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희망봉을 연결하는 아프리카 종단 철도 등의 구상이 쏟아졌다. 비용과 수익을 꼼꼼하게 따지는 경제적 합리성을 초월해 야망과 열풍이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메가 프로젝트였다. 그들은 철도를 놓을 수 없는 대양에는 다국적 해운회사를 만들어 연결하려고 했다. 바로 철도-해운 네트워크다. 서구 열강은 치열하게 경쟁하며 확보한 영토에 이 네트워크를 부설했다. 그런 경쟁의 정점이 바로 1차대전이라고 해석하는 전문가들도 꽤 있다.

중복 투자, 방만한 경영
버블은 과잉·중복 투자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정부가 철도 건설에 거의 개입하지 않았던 영국과 미국에서는 같은 구간에 2~3개 노선이 부설되는 일이 흔했다. 이는 곧 철도 채권과 주식의 부실화로 이어졌다. 베어링브러더스·로스차일드·JP모건 등 투자은행이 채권자들의 위임을 받아 철도회사 통폐합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해서 인수합병(M&A)·출자전환·구조조정 등 워크아웃 절차가 만들어지거나 자리 잡았다.

철도회사는 소유와 경영이 본격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한 곳이었다. 방대한 자본 투입과 유지 보수를 위한 막대한 인력구조 등 때문에 이전처럼 가족 경영은 적합하지 않았다. 과학적인 경영이 필요했다. 설립자나 후손보다는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경영자가 중시됐다. 특히 JP모건 등 투자은행은 철도회사 워크아웃을 주도하며 유능한 경영자를 선임해 관리를 맡겼다.

외부 투자자는 또 방대한 철도회사 경영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기업의 내부자(경영자 등)-외부자(투자자 등) 사이가 멀어졌다. 분식회계가 발생할 틈이 더욱 커졌다. 고(故) 호레이스 그릴리 뉴욕트리뷴 편집장은 “이리철도 회계장부를 보면 알래스카에 열대과일이 주렁주렁 열려 있는 듯하다”고 꼬집었다. 알래스카를 열대지역으로 묘사할 정도의 분식회계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내부자들의 방종에 외부자들이 격분했다. 이들의 불만을 등에 업은 증권사·투자은행이 공격에 앞장 섰다. 이들은 ‘외부 회계사’의 감사를 받지 않은 철도회사 증권은 인수하지 않기로 했다. 바로 1890년대 공인회계사(CPA)가 탄생한 배경이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철도는 현대 금융장치 가운데 공모와 워크아웃, 회계감사 시스템이 탄생하거나 본격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셈이다.

에드워드 챈슬러는 『금융투기의 역사』에서 “철도는 인터넷 이전에 인간의 욕망과 열망을 가장 잘 부추긴 신기술”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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