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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1만km ‘고속철 장성’에 10년간 875조원 투자

벨기에 대사관에 근무하는 이명순 재경관은 프랑스 파리까지 다녀오는 출장에 고속열차인 탈레스를 애용한다. 브뤼셀에서 파리까지 300㎞ 거리를 1시간20분에 주파한다. 왕복 요금은 미리 예약할 경우 100유로(15만원) 정도로 저가 항공보다 비싼 편이다. 그러나 도심 외곽의 공항에서 시내 중심가까지의 교통비와 이동시간을 감안하면 오히려 싸게 느껴진다. 이 재경관은 “승용차는 시내의 교통체증과 주차문제 때문에 피한다. 기차를 타고 파리 북역에서 내리면 시내 중심가가 지척이어서 당일 출장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유럽은 ‘21세기는 철도의 시대’라는 말이 실감나는 곳이다.

세계는 지금 고속철 경쟁 중

속도 빨라지며 인기 급상승
199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자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럽 배낭여행 붐이 불었다. 당시의 필수품 가운데 하나가 일정기간 철도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유레일패스다. 런던·파리·로마처럼 역사가 긴 유럽의 대도시는 대부분 기차역이 도심에 자리 잡고 있다. 한 도시를 둘러보고 야간열차를 타면 다음 날 아침 다른 도시에 도착하는 기차는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에게 큰 선물이었다. 다만 비즈니스맨들에게는 그다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안전하고 편리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상황이 바뀌고 있다. 1994년 개통된 런던~파리 간 유로스타는 2003년 영국에 고속철도가 깔리면서 운행시간이 2시간15분으로 단축됐다. 프랑스의 TGV, 독일 ICE 같은 고속철도 노선도 잇따라 개통됐다. 프랑스국영철도(SNCF) 조사에 따르면 승객들은 “기차로 4~6시간 거리까지는 비행기보다 고속철도를 타겠다”고 응답했다.

유럽의 철도는 고속철도 중심으로 급격하게 변신하고 있다. 프랑스는 지난해 말 현재 운영 중인 고속철도만 1840㎞에 달한다. 독일(1285㎞)·스페인(1594㎞) 등도 고속철도 강국이다. 국토해양부 김석기 국제철도팀장은 “스페인이 3900㎞, 프랑스는 2900㎞를 더 건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시아에서는 전통적인 철도 강국인 일본과 새로 고속철도에 주력하고 있는 중국이 대표적이다. 신칸센을 자체 개발한 일본은 북쪽 아키타에서 도쿄와 오사카를 거쳐 남쪽 후쿠오카에 이르는 국토종단 노선을 비롯해 2452㎞의 고속철도망을 갖추고 있다.

전국에 7만7000㎞가 넘는 철도망을 갖고 있는 중국은 전체의 13%가 넘는 1만㎞를 고속철로 바꾼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2020년까지 총 5조 위안(875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올해에만 1조 위안(175조원)을 투자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베이징(北京)~톈진(天津) 구간을 비롯해 칭다오(靑島)~지난(濟南) 등 2600㎞의 고속철도를 잇따라 개통했다. 최근에는 중국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의 주도인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출발해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를 거쳐 독일까지 이어지는 유라시아 횡단 고속철도망 건설을 추진 중이다. 고속철도 전문가인 왕멍수(王夢恕) 베이징교통대 교수는 “고속철도를 따라 중국 서부와 중앙아시아에서 개발되는 자원은 중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돕는 물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자동차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긴 18만7000㎞의 철길을 깔아놓은 철도 대국이기도 하다. 미국의 화물열차는 100∼200량의 화물칸을 매달아 유난히 길다. 다만 화물 운송에 주력하다 보니 운영 중인 고속철도는 아직 없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샌디에이고에 이르는 1250㎞의 고속철도를 건설하는 것을 비롯해 동부 해안을 따라 뉴욕에서 마이애미를 잇는 노선 등 총 1만2500㎞를 계획하고 있다. 지난해 4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고속철도에 80억 달러(약 9조6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오마하의 현인이라고 불리는 투자의 달인 워런 버핏은 때맞춰 미국 내 매출 1위인 철도회사 벌링턴노던샌타페이(BNSF)를 260억 달러(약 30조2000억원)에 인수했다. 부채 등을 감안하면 BNSF 인수에 들어간 돈은 모두 440억 달러(약 52조8000억원)에 달한다. 버핏은 “철도는 고유가 시대가 이어지고 환경규제가 강화될수록 수익이 커지는 회사”라고 설명했다.

세계의 철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시베리아횡단철도(TSR)다. 동쪽 출발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역에는 ‘9288’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념탑이 있다. 서쪽 종착지인 모스크바역까지 거리가 9288㎞라는 의미다. 서울~부산 거리의 22배로 지구 둘레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시속 80~90㎞의 속도로 꼬박 6박7일, 156시간을 달려야 한다. 1891년부터 25년에 걸쳐 건설한 TSR은 러시아 철도의 상징이다. 냉전을 거치며 유럽에 비해 철도가 낙후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유가 상승에 따른 경제 호전으로 지난해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사이 600㎞에 고속철도를 완공하는 등 철도 현대화에 시동을 걸었다.

국토해양부 이승호 철도정책관(국장)은 “열차의 속도가 빨라진 것과 함께 구도심 재개발 사업이 맞물리면서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철도의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구시가지 중심에 자리 잡은 기차역이 관광뿐 아니라 쇼핑·숙박의 중심지 역할까지 맡게 됐다는 것이다. 이 국장은 일본 도쿄역과 독일 베를린역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일왕이 살고 있는 고쿄(皇居)와 정치의 중심인 국회의사당 앞에 자리한 도쿄역은 비즈니스·쇼핑·이벤트공연장인 마루빌딩과 유명 브랜드 매장이 줄지어 있는 마루노우치, 각종 공연과 컨벤션이 벌어지는 도쿄국제포럼을 아우르고 있다. 베를린 중앙역은 2006년 서베를린 레터역 자리에 새로 지었다. 역 안에 두 곳의 대형 마트까지 갖춰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필요한 물건도 살 수 있다. 이 국장은 “공항에서 내려 짐을 들고 한 시간 이상 도심으로 이동하는 것과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간단한 저녁거리를 사 들고 대중교통편으로 집으로 가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편리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대도시에서 승용차의 도심운행 제한을 강화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도심 철도역의 역할은 갈수록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에너지·환경오염 승용차의 5분의 1
21세기 들어 철도의 재발견을 가져온 원동력 가운데 한 축은 친환경이다. 그만큼 환경 친화적인 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한 사람을 1㎞ 옮기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승용차가 532㎉인 데 비해 철도는 94㎉에 불과하다. 그만큼 오염물질 배출도 적다. 같은 사람을 승용차로 실어 나르면 철도를 이용할 때보다 온실가스가 여섯 배 이상 나오는 셈이다. 허준영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사장은 “지난 세기 자동차와 항공기에 밀려 내리막길을 걷던 철도가 전 세계적인 저탄소 녹색성장의 바람을 타고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국토해양비서관을 지낸 신혜경 박사는 최근 영국 런던과 벨기에 브뤼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열흘간 돌면서 몸무게가 3㎏이나 줄었다. 승용차 대신 지하철과 철도를 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런던은 차를 가지고 다니면 불편하고 돈이 많이 들게 교통시스템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도심에 차를 가지고 들어가면 혼잡통행료로 8파운드(약 1만4000원)를 내야 한다. 주차장도 거의 없고, 간혹 있어도 주차비가 시간당 6파운드(약 1만원)로 비싸다.

브뤼셀 도심에는 트램이라는 노면 전차가 다닌다. 한 번 타는 데 1.2유로(1800원)로 비싼 편이지만 루이즈 애비뉴 등의 주요 도로와 그랑플라스나 왕궁·미술관 등 유적지 등을 연결하고 있다. 출퇴근하는 시민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애용한다. 지하철과 긴밀하게 연계돼 있어 도시 외곽에서 도심의 사무실까지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

암스테르담에서 25㎞ 떨어진 신도시 알메러(Almere)는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25분이면 닿는다. 주말에는 알메러 시티센터에 자리 잡은 쇼핑센터로 나들이하는 암스테르담 시민들이 기차를 가득 메운다. 신 박사는 “유럽 도시들처럼 녹색환경을 위해서는 철도·지하철 이용을 강요(?)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고 말했다.

고속철 사업은 경기침체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일자리 창출은 물론 완공 후에는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프랑스와 일본은 고속철도 수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철도 투자에 여전히 인색하다. 한국의 인구 1만 명당 철도 길이는 700m로 철도 관련 통계를 내놓은 27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짧았다. 캐나다가 17.3㎞로 가장 길었고 미국은 7.5㎞,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도 4㎞를 넘었다. 일본 역시 1.6㎞로 한국의 두 배가 넘는다. 우리나라의 철도 관련 투자는 지난해 5조3000억원으로 도로 투자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반면 유럽중앙은행에 따르면 1998년에서 2005년까지 유럽의 철도 투자액은 1855억 유로(약 278조원)로 도로 투자의 2.3배에 달했다. 신혜경 박사는 “중장기적으로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국제철도 시대에 대비해 철도 투자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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