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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스펀의 도취’ 시대 가고 ‘차이나 플레이션’ 오나

자살과 파업, 임금 상승, 노동시간 단축 등 중국 노동시장이 급변하고 있다. 사진은 최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가족들이 중국 선전의 폭스콘 공장 앞에서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는 모습이다. [블룸버그 뉴스]
미국 애플 최고경영자(CEO)인 스티브 잡스는 콘퍼런스를 즐긴다. 무대에 올라 모든 참석자들의 시선과 주제를 독점하며 애플의 첨단 제품을 공개했다. 아이팟과 아이폰, 아이패드가 그렇게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그런데 이달 1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정보통신(IT) 콘퍼런스의 무대에서 잡스는 독점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애초 그의 주제는 아이패드 IT 동향이었지만, ‘최근 현안’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최근 현안이란 아이패드 생산업체인 중국 폭스콘의 노동자들의 연쇄적인 자살 사태를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잡스는 “정말 곤혹스러운 사건”이라고 말문을 연 뒤 “왜 그런 사건이 났는지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잡스가 실태 조사 중이라는 사실을 밝힌 그날 델과 휼렛패커드도 폭스콘 조사에 들어갔다고 발표했다. “세계적인 IT기업 경영자들이 심각한 변화의 조짐 앞에서 긴장하고 있다”고 비즈니스 위크가 이달 3일 보도했다. 글로벌 기업과 중국 저임금의 ‘행복한 동거’가 끝나는 조짐이다.

스티브 잡스
“中 노사관계는 문화혁명 중”
애플의 생산업체인 폭스콘과 최근 파업사태를 겪은 혼다의 광둥성 부품공장은 임금 인상을 단행했다. 각각 30%와 24%를 올렸다. 일단 사태를 진정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애플은 아이패드 주문이 밀려 있는 상황에서 폭스콘 생산을 중단하기 어려운 처지다.

이론적으로 기업들은 중국보다 임금이 싼 베트남 등의 생산업체와 계약을 맺는 방법을 모색할 수는 있다. 하지만 비즈니스 리더들은 그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말했다. 중국 신전 등 다섯 곳에 생산시설을 두고 있는 국내 IT 부품업체인 갤럭시아 고위 관계자는 “베트남 등에는 중국만큼 원자재, 숙련공, 부품 조달 네트워크가 갖춰져 있지 않다”며 “게다가 중국이 핵심 중간재까지 생산하기 시작해 외국 기업들이 쉽게 중국산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 노동시장에서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인력 부족이다. 인구 대국이란 별명이 무색할 지경이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중국 부모들은 1970년대부터 한 자녀만을 낳았다. 그들은 자녀를 대학 교육까지 시켜 화이트 칼라로 만들었다. 그러자 컴퓨터 생산라인 등에서 일할 블루 칼라 인력이 부족해졌다. 여기에다 중국 정부의 지역개발 정책 때문에 시골에서 상경하는 노동자들도 많이 줄었다.

중국 젊은 노동자들의 사고방식도 바뀌고 있다. 갤럭시아 관계자는 “예전 근로자들은 돈을 중시해 여가 시간을 포기하고 시간외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어렵고 더러우며 위험한 일을 싫어하고 돈과 함께 여가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노동시간도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권리의식도 강하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혼다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여 임금 인상을 얻어냄에 따라 파업 사태가 중국 전역 외국 기업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의 방조도 파업 사태가 확산될 가능성을 키워주고 있다. 중국에서 파업은 법적으로 금지돼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외국 기업에서 발생한 파업은 묵인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혼다 파업이 오래 이어졌지만 중국 정부는 경찰력을 투입하지 않았다. 갤럭시아 관계자는 “국내 노동계가 87년 이후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는데, 지금 중국이 그 단계에 와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프리드먼 교수는 “중국의 노동시장이 문화혁명 같은 격변의 와중에 있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인들의 소득이 늘어나면서 중국 내수 시장의 매력이 커지고 있다. 미 IT 분석가인 파멜라 고든은 최근 이코노미스트지와 인터뷰에서 “중국이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바뀌고 있다”며 “이는 글로벌 기업들이 임금 상승을 감수하면서 중국 협력업체나 생산시설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라고 말했다.

美 나이키처럼 변신해야
중국 노동자들의 자살과 파업 때문에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지 실추라는 막대한 비용까지 치르고 있다. 중국의 저임금에 의존한 기존 전략을 포기하고 대안을 찾아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제프리 가튼 예일대 교수(경영학)는 『부의 혁명』이란 책에서 이를 ‘나이키 모멘트’라고 불렀다. 이는 세계적인 스포츠 용품업체인 나이키가 동남아 저임금에 의존하던 방식을 포기한 사건을 말한다.

나이키 모멘트의 시작은 사진 한 장이었다. 98년 동남아 한 소년이 가녀린 손으로 나이키 축구공을 꿰매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발표됐다. 산뜻하고 세련된 나이키 제품 이면의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 셈이었다. 소비자들은 아동 노동으로 생산된 제품을 사용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자책감은 순식간에 나이키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미국·유럽에서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필 나이츠 당시 나이키 최고경영자(CEO)는 불매운동에 굴복했다. 매출 감소도 힘들었지만 이미지를 파는 기업으로서 글로벌 시장에서 평판이 악화되는 사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나이키는 해외에 설치한 자체 생산시설을 폐쇄해나갔다. 생산은 아웃소싱했다. 나이키 본사는 디자인과 품질관리, 마케팅에 치중했다. 대신 임금과 근로시간, 작업환경 등에 대한 ‘나이키 기준’을 만들었다. 이를 만족시키지 못한 업체에는 생산을 맡기지 않았다. 또 저가 대신 고가 전략을 선택했다. 이 전략이 효과를 발휘할 때까지 단기적인 수익 감소를 나이키는 감내해야 했다. 이제 중국에 진출한 글로벌 IT와 자동차 기업 등도 90년대 나이키처럼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처지다.

글로벌 기업들은 중국의 임금 상승분을 곧바로 가격에 반영하기 힘들다. 글로벌 시장의 치열한 경쟁 때문이다. 생산성을 높여 임금 상승분을 흡수하거나 이윤 폭이 줄어드는 것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중국 임금이 오른 만큼 판매가격을 인상할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기업 경영자 가운데 임금 상승 때문에 실적이 줄어들어 주가가 떨어지는 상황을 오래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 UC어바인 피터 나바로 교수(경제학)는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WSJ)과 인터뷰에서 “그린스펀의 도취(Greenspan’s Euphoria)가 사라질 가능성이 엿보인다”고 말했다. 그린스펀의 도취는 중국 저임금 덕분에 물가 압력이 낮아져 앨런 그린스펀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시절(1987~2005년)에 즐긴 편안함을 말한다.

그린스펀은 2002년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열린 세계 중앙은행가 콘퍼런스에서 “미국과 유럽의 물가가 90년대 내내 안정적인 흐름을 보인 까닭은 풍부하면서 값싸고 질 좋은 중국 노동력”이라며 “그 덕분에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80년대 이전 중앙은행가들이 꿈꾸지 못했던 행복감을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팔고 사는 일반 공산품의 평균적인 원가구조를 보면 그린스펀의 도취를 실감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아이패드처럼 고가 첨단 제품을 제외한 일반 공산품의 원가 가운데 20% 정도를 임금으로 보고 있다. 40%대인 원자재 값 다음으로 가장 큰 몫이다. 이어 광고(9%), 연구개발(8%), 이자(3~4%), 물류(3%) 순이다. 중국 저임금이 사라지면 물가 압력이 커지기 십상인 구조다.

지금 당장 중국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글로벌 경제가 금융위기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이 재정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긴축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주요 국가의 물가 압력이 곧 커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미국·중국 경제가 활력을 되찾으면 ‘차이나플레이션(Chinaflation·중국발 인플레)’ 우려가 현실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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