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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헛된 꿈으로 끝난 고종 임금의 미국 ‘짝사랑’

1883년 9월 19일 보빙사가 국왕을 대하는 예절로 큰절을 올리자 아서 미국 대통령이 당황한 듯 서 있다(미국 신문 게재 사진). 고종은 미국이 일·중·러를 견제해 우리의 독립을 지켜주길 바랐다. “우리 공화국은 다른 나라 국민을 지배·통치하거나, 영토를 획득·점령할 의도가 전혀 없으며 오로지 호혜적인 교역을 통해 이익을 같이 나누고자 한다.” 그러나 아서 대통령의 말이 웅변하듯, 미국은 고종의 바람과 달리 경제적 이익을 취할 시장으로 이 땅을 보았을 뿐이었다.
1883년 5월 최초의 미국공사 푸트(L. H. Foote)가 이 땅에 오고 제3국의 부당한 간섭이나 침략에 대한 중재를 제1조에 못 박은 조미조약 비준문서가 교환되자, 천군만마를 얻은 듯 고종은 체통을 잊고 춤을 출 만큼 기뻐했다. 한 해 전 5월 미국과 조약을 맺은 직후 터진 임오군란으로 중국군이 진주하고, 조선이 중국의 속국임을 명시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은 상황에서 미국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대우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1883년 7월 민씨척족의 거두 민영익과 개화파 홍영식 등 8명을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에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때 고종은 미국을 중국과 일본의 침략에서 왕국의 독립을 지키는 세력 균형의 지렛대로 믿을 수 있을지를 알고싶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임진왜란 직전 일본의 침략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통신사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마냥 전권대신 민영익과 부대신 홍영식은 미국에 대해 서로 다른 진단을 내렸다. 미국을 우리의 독립을 지켜줄 전략적 동반자로 본 홍영식은 중국을 몰아내는 데 미국이 힘을 보태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미국은 갑신정변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나는 암흑에서 태어나 광명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제 나는 다시 암흑으로 되돌아왔다. 아직 나는 내 길을 똑똑히 볼 수 없지만 곧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민영익은 미국이 문명국임을 인정했지만 우리를 지켜줄 우방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의 후원으로 미국에 유학한 유길준의 미국에 대한 평가는 민영익의 생각을 대변한다. “미국은 우리와 통상의 상대로서 친할 뿐이며, 우리의 위급함을 구해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는 못 된다.” 민영익은 중국의 힘에 기대어 정권을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그때 우리는 무모한 갑신정변으로 인해 청일전쟁이 터질 때까지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력으로 근대화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스스로 도무지 걷잡을 수 없는 열강의 음모의 대양(大洋) 위에 표류’하는 처지였던 한 세기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기 지속하는 이 땅의 지정학적 특징은 강대국의 이해가 엇갈리는 세력 각축장이라는 점이다. 역사에 되돌이표를 다시 찍지 않기 위해 오늘의 우리가 실패의 역사에서 얻을 교훈은 자력 없이 남의 힘을 이용하는 책략만으로는 다시 돌아온 열강 각축의 시대를 뚫고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현명한 대외정책과 스스로를 지킬 튼실한 국방력, 이것만이 다시 돌아온 열강 쟁패의 세상에서 우리의 번영과 양심을 지켜줄 방패일 터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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