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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현대를 살지만 정신은 조선사람처럼 삽니다”

“와~ 혼자서 이 책을 다 번역하신 거예요?” “그렇죠. 이거 번역할 때 정말 고생 많이 했는데….”27일 서울 구기동 한국고전번역원 자료실에서 정선용 팀장(오른쪽)과 신상후씨가 고전(사계전서)을 펼쳐보며 이야기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정선용(53)씨는 26년간 고전번역을 했다. 지금도 한국고전번역원(원장 박석무) 번역 1 팀장으로 번역을 하고 있다. 정 팀장은 27일 오후 특별한 손님을 맞았다. 고전번역원 전문과정 2학년인 신상후(29)씨다. 신씨는 대학 3학년이던 2006년부터 고전번역원 연수과정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고전번역 공부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날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있는 번역원 옥상에서 처음 만났다. 고전을 다루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대화는 정중하고 조심스러웠다.

날마다 ‘타임머신’ 타는 정선용신상후, 고전번역의 세계

신=고전을 공부한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한자를 다 아느냐며 놀라워해요. 사실 모르는 글자 투성이인데 말이죠(웃음).

정=그게 보통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죠. 수십 년간 번역만 해온 나도 모르는 한자 많은데요. 한자는 낱글자이고 한문은 문장이거든요. 영어 단어만 많이 안다고 해서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닌 거랑 똑같은 거죠.

신=한문으로 된 고전이니까 중국 사람이 번역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정=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우리 선조의 고전은 한자로 쓰이긴 했지만 중국어는 아니죠. 또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어법이나 지명, 사물 이름이 많아 중국 사람이 봐도 잘 모를 거예요.

신=번역자는 투명한 셀로판지처럼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그대로 옮기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번역을 창작이라고도 하잖아요,번역하는 사람은 창작을 하는 창조자라고 봐도 되나요.

정=번역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고 있는 고전번역은 학술연구를 위한 것이에요. 이 때문에 일단은 원문에 충실해야 해요. 원문을 보지 않은 사람이 번역문만 봐도 원문을 읽은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말이죠. 물론 100% 동일한 의미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번역의 숙명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범위 안에서 번역자의 스타일이 들어가기도 해요.

신=그렇다면 선생님이 생각하는 고전 번역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정=다른 번역과 달리 고전 번역은 내가 한번 번역하고 나면 최소한 한 세기 안에는 다른 사람이 이 책에 손대지 않아요.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요. 물론 그만큼 신중히 번역해야겠죠. 또 한 가지는 내가 번역해 놓은 글이 드라마나 영화 같은 문화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보면 기분이 짜릿하죠.

1985년 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 전신)에 입사한 후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비롯해 사계전서 학봉전집 해동역사 같은 고전 13종 70책을 번역한 정 팀장은 한학의 전통을 이을 후배가 없어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대화 중간중간 고전을 공부하는 젊은 후배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신씨는 동양철학 공부를 위해 고전을 제대로 읽어보려고 교육원을 찾았다. 처음에는 한문공부가 굉장히 어려웠지만 1년쯤 지나자 한문에 재미를 붙여 전문과정까지 들어가 공부하고 있다.

정=사실 한문 고전을 공부하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젊은 사람은 지루할 수 도 있을 텐데.

신=고전은 저자를 믿을 수 있는 글인 것 같아요. 이 때문에 책을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나오면 책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거야 하면서 며칠이고 정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요. 결국 정답을 찾아냈을 때 그 환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정=벌써 그 환희를 알았단 거예요?(웃음) 나도 그래요. 번역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여기저기 자료도 찾아보고 동료한테도 물어보는데 그래도 안 풀리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다 보면 꿈속에서까지 고민을 하는데 결국 꿈에서 정답을 찾은 적도 많죠.

신=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자부하지만 현실적으론 고전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가끔 서운할 때가 있어요.

정=나 역시 우리가 노력하는 것에 비해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한테 서운할 때가 있죠. 그렇지만 고전 번역은 사명감하고 자부심으로 하는 거예요.
정 팀장은 “한문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에요. 한곳에 매몰되지 않고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는 연습을 많이 하세요”라는 조언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시는 산문과 달라 한 글자가 결정적
정선용 팀장은 지난해 말부터 사무실에만 나오면 100년 전 자결한 항일운동가 향산(響山) 이만도 선생이 된다. 이만도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설움과 울분을 참지 못해 단식에 들어가 24일 만에 목숨을 잃었다. 정 팀장은 지난해 말부터 이 선생의 문집인 향산집(響山集) 번역을 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향산집을 6책(권) 분량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정 팀장은 시를 맡았다. 그래서 작가의 입장에서 문집을 읽으려 한다. 향산집에는 이만도 선생이 죽어가면서 썼던 글과 시(사진)가 기록된 ‘청구일기(靑丘日記)’가 포함돼 있다.

정 팀장은 “몸은 현대를 살고 있지만 일하는 동안 정신은 조선시대를 산다”며 “번역할 글이 쓰인 당시 상황 속, 작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 자체가 돼야 비로소 제대로 된 번역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시는 산문과 달리 한 글자라도 잘 못 해석하면 의미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번역하기 가장 까다롭다. 한글로 바꾼 다음에도 운율을 맞춰야 한다. 그래서 경험 많고 실력 있는 번역자가 주로 담당한다. 정 팀장은 “번역을 하다 이만도 선생의 처절한 심정이 느껴져 가슴이 너무 아파 작업을 더 이상 못할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정 팀장의 번역작업은 대본을 받으면 찬찬히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글이 얘기하는 것을 상상한다. 그러고 나서 한 구절씩 번역을 시작한다. 번역한 글은 곧바로 책상 오른편에 있는 컴퓨터에 입력한다. 번역할 때는 일종의 분업이 적용된다. 그가 번역 중인 대본은 세로쓰기로 돼 있었는데 대본 곳곳에 ‘○’ 모양의 ‘표점(끊어 읽을 자리를 구분하는 표시)’이 찍혀 있었다. 인쇄를 할 때 이미 표점이 찍혀 오는데 이는 1차 번역자들의 작업 결과다. 20년 넘는 경력의 고전 번역가로 한국고전번역원 개원의 주역인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 신승운(59) 교수는 “한문은 띄어쓰기나 마침표가 없는 글이라 어디서 끊어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표점이 찍혀 있으면 더 빠르고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1차 번역자들이 표점을 먼저 찍은 뒤 2차 번역자에게 넘긴다”며 번역의 과정을 설명했다.

정 팀장은 “같은 번역이라고 해도 영어나 일어 같은 언어의 번역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문 고전 번역은 기본적인 문법만 있고 그때그때 사례에 맞춰 해석하는 거라 몇 배 더 어렵다”며 “그래서 ‘문리가 나야지(한문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 것)’ 제대로 된 번역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책 한권 번역보다 번역자 양성 시급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고전 번역 인력을 양성하는 사업을 한다. 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은 1974년 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에서 한학의 전통을 계승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었다. 처음엔 국역연수원으로 불리다 2007년 명칭이 바뀐 고전번역교육원은 지금까지 1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한문고전 번역자·연구자를 양성하고 있다.

서정문 한국고전번역원 사업본부장은 교육원을 ‘현대판 서당’이라고 불렀다. 그는 “과거부터 이어져 오던 한문 전통 문화의 맥을 잇는 유일한 곳”이라며 “책 한 권 1, 2년 일찍 번역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번역 인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육원에서는 매년 1월 한문 번역과 논술, 면접을 통해 신입생을 뽑는다. 전주에 분원이 있으며 교육과정은 입문단계인 연수과정(서울 40명, 전주 20명)과 심화단계인 전문과정(서울 5명)으로 나뉜다. 각각 3년과 2년 과정으로 해마다 1, 2학기로 나눠 일주일에 서너 번 수업이 진행된다. 학생들은 논어·맹자·주역·춘추·예기 등의 고전을 비롯해 고전번역 방법론, 한문문체론 등을 배운다.

대학·대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연수과정 장학반으로 입학하면(서울 15명, 전주 5명) 재학 중인 대학·대학원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지원한다. 전문과정은 매달 80만원의 연구장학금을 받는다. 대신 과정을 마친 후 1년간 고전번역원에서 인턴으로 근무해야 한다. 서정문 사업본부장은 “우수한 한문 번역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투자다”며 “고전교육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한문에 빠져 공부하고 싶어 모인 사람들이라 열의가 굉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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