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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 다 튼다고요? 그때 무슨 짓 했는지 무섭네, 허허”

임권택 감독은 새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의 촬영을 최근 마쳤다. 현재 편집 등 후반작업이 진행 중이다. 1962년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 이후 101번째 작품이다. 신동연 기자
“참 잘됐어요. 어쩌다 임권택이 영화 하나가 잠깐 상 타고 이후 쭉 끊어졌다면 그 나라의 영화 수준을 인정해 줄 수가 없는 거예요. 그 뒤로 박찬욱·이창동, 이런 감독들 영화가 칸에 출품되고 성과를 얻어내니 한국영화의 역량이 드러나는 겁니다. 너무 잘된 일이에요. 괜찮은 나라, 영화를 꽤 탄탄하게 해낼 수 있는 나라에서 영화로 밥을 먹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반기 ‘임권택 전작전’ 앞둔 임권택 감독

임권택(74) 감독 특유의 눌변에는 반가움이 역력했다. 그를 만난 건 마침 올 칸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이 영화 ‘시’로 각본상을 받았다는 낭보가 전해진 직후였다. ‘1등 격인 황금종려상을 왜 못 탔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더라’고 전하자 임 감독은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 “(영화제는) 심사위원들의 기호와 성향에 따라 상을 타고 못 탈 수도 있는 세계, 그걸 산수하듯 수치를 내서 따질 수 없는 세계예요.” 사실 이 콧대 높은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한국영화가 진출하기 시작한 것 자체가 불과 10여 년이 못 된다. 2000년 임 감독이 ‘춘향뎐’으로 레드카펫을 밟은 게 처음이다. 그러니 한국영화의 사상 첫 수상, 즉 2002년 임 감독이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받았을 때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다. 그 한 사람이 아니라 한국영화계 전체의 유례없는 쾌거로 받아들여졌다.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서 두 달간 상영
물론 이런 얘기를 하러 그를 만난 건 아니다. 임 감독은 새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의 촬영을 최근 마쳤다. 반세기 동안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의 101번째 작품이다. 또 다른 새 소식도 있다. ‘임권택 전작전’이 열리는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이병훈)이 준비 중인 이 행사는 지금까지 만든 100편 중 필름이 남아 있는 70여 편을 한꺼번에 선보이는 최초의 자리다. 올 하반기 두 달에 걸쳐 열릴 계획이다.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62년)는 디지털 복원을 거쳐 상영된다.

임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의 촬영 현장. 강수연(왼쪽)·박중훈(오른쪽 앉아 있는 사람)씨가 주연을 맡았다.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전작전의 소감을 묻자 임 감독은 “솔직히 말해 좀 걸러버리고, 안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내가 무슨 부끄러운 짓을 해놓았는지 (영화들을 완성한) 그 이후로는 안 봤으니까 모르거든요. 저질러 놓고는 돌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서워요, 무서워. 허허. 무슨 망신살이 뻗칠지.”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한 평가가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박하다. 100번째니, 101번째니 세는 것에도 그랬다. “아주 싫어요. 내가 왜 이렇게 싫어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100편쯤 왔으면, 밖에서 생각하기에 그런 감독다운 무엇이 영화로 드러나야 할 것 아니요. 그런데 한번도 드러난 적이 없고, 작품에 대해 한번도 스스로 만족한 적도 없어요. 계속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턱걸이를 하면서도 매번 실망하고. 내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은 것도 그래서예요. 그런 데다 대고 100편이니 뭐니 하면 남의 속에 불지르는 거지.”

어쩌면 이런 자기부정과 스스로의 평가절하가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이력을 살펴보면 100편의 영화 중 절반이 60년대 초 데뷔 이후 10년 남짓 만에 만들어졌다. 액션활극·전쟁물·사극 등 각종 장르영화를 1년에 5, 6편씩 찍었다는 얘기다. 60년대는 한국영화의 황금기였다. 다작은 흥행 감독들에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 영화의 아류, 미국 영화 흉내내기를 한 50편쯤 찍었던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전환점을 만든 건 그 자신이다. 전작전에서 볼 수 없는, 그러니까 필름이 없어진 영화 중 아쉬운 작품을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잡초’(73년)라고 있어요. 그전까지 내 영화들이 대개 우리 삶하고는 거의 무관한 것이었고, 그런 영화의 흥행으로 내가 1년에 몇 편씩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거였어요.

‘잡초’는 그런 데 대한 자기반성이랄까, 기왕에 해왔던 내 영화로부터 내가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로 만들었던 영화예요.” ‘잡초’는 일제시대와 6·25의 험난한 세월을 산 한 여자의 일생을 그린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51번째 작품, 즉 지금까지 영화 100편의 한중간이다. 그의 한국적 영화세계는 이처럼 70년대에 본격화되기 시작해 80년대 ‘만다라’ ‘길소뜸’ ‘씨받이’ 등 유럽에서도 주목을 받게 된다. 90년대 ‘서편제’로는 한국영화 사상 초유의 흥행성적은 물론 한국적인 것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신드롬을 낳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서편제’는 본래 흥행을 겨냥한 영화가 아니다. 직전에 ‘장군의 아들’이 거둔 성공 덕에 흥행 부담을 크게 덜고 선택한 소재였다.

‘서편제’를 두고 그는 “흥으로 찍었다”는 말을 썼다. “내 영화가 히트를 했다면 그건 (만들 때에도) 흥이 좀 크게 났던 작품”이라는 말도 했다. 영화로 반세기를 살아오게 한 힘도 흥일까. “흥이 없었으면 못하는 거죠. 영화에 빠지고 미칠 수 있는 그런 것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리도 없고, 와지지도 않을 거 아니요.” 널리 알려진 대로 그의 영화계 입문은 고상한 명분과 거리가 멀다. 전남 장성에서 나고 자란 그는 18세에 집을 나왔다. 피란 시절의 부산에서 신발장사 같은 걸 하다 생계방편으로 영화판에 들어섰다. 액션물로 이름난 정창화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다가, 그를 눈여겨본 영화사의 제안으로 20대 중반 젊은 나이에 감독이 됐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서 명작으로 남기자, 이런 생각을 갖고 영화를 처음 시작했던 게 아니죠. 주어진 시나리오를 고쳐가면서 흥으로 만들고, 그런 게 체질화된 거죠.” 이건 늘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만들어가는 자신의 버릇을 두고 그가 들려준 설명이기도 하다.

촬영을 마치고 편집 중인 새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는 한지(韓紙)가 소재다. “열심히 하면 될 거 아니냐고 생각하고 대들었는데 그게 아니에요. 촬영이 끝날 때까지도 한지에 대해 얘기해주겠다는 연락들이 왔어요. 이렇게 넓고, 우리 생활문화와 깊게 밀착돼 있는 걸 영화 소재로 잡았다는 게 후회가 되기도 하고, 잘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럽니다.” 임 감독은 대신 박중훈·강수연·예지원 등 배우들을 두고 “내가 복이 많다”고 했다. 박중훈씨는 병든 아내를 돌보며 한지 관련 업무를 맡는 공무원으로, 강수연씨는 영화 속에서 다큐를 찍는 감독으로 등장한다.

101번쨰 영화‘달빛 길어 올리기’촬영 마쳐
임 감독의 두 아들도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둘째는 연기를 해보겠다고, 첫째는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해보겠다고 그러고 있어요. 이건 좀 납득을 못하실는지 몰라도(그는 40대에 결혼해 남들보다 늦게 아들들을 봤다), 내가 자상한 아비 노릇을 한 적이 없어요. 만날 영화 찍는다고 떨어져 살다시피 했죠. 영화 100편이라는 게 애들 키우는 데는 이런 문제예요. 어쩌다 만나면 쓸데없이 엄격했죠. 명색이 아비니까 애들을 좀 바르게 키워서 사회에 내보냈을 때 폐가 되는 짓을 하면 안 된다 하는 것만 생각했어요…. 아비라는 자가, 둘째가 연기자 되겠다고 연기과를 다닌 지 1년쯤 뒤에야 물어봤어요. ‘하류인생’ 찍을 때였는데, 밤새워 운전해서 나를 세트장에 태워다 주는 길에 너, 연기자가 되려고 그러냐, 연기자가 되면 어떤 역할이 하고 싶으냐고 물었어요. 속으로 주인공 운운하는 대답이 나오면 이거 감당할 길이 없다 싶었는데, 자기는 카리스마 있는 악역 같은 걸 바란다고 해요. 아비가 감독을 하고 있다고 아비 도움 받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더니, 그런 생각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는 거예요….” 영화사가들은 그의 영화에서 굴곡 많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인이 살아온 삶을 읽어내곤 한다. 아들들 얘기를 하는 동안 그의 얼굴에는 같은 시대를 살아온 숱한 엄부(嚴父)들의 낯익은 표정대로 회한과 자애가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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