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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땐 도성 안에 호랑이 출몰, 대궐에서 새끼도 낳아

프랑스 신문 ‘르 프티 주르날’ 1909년 12월 12일자에 실린 조선 관련 그림이다. 호랑이가 마을을 덮쳐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호식’은 조선인들의 주요 사망 원인 중 하나였다. [중앙포토]
“인왕산 호랑이 으르르르, 남산의 꾀꼬리 꾀꼴꾀꼴.” 조선시대 한양 어린이들 사이에서 불리던 민요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역사 속 서울엔 야생동물들이 꽤 많이 살았다. 그중에서도 단연 힘센 동물은 호랑이였다. 먹이사슬 최종 포식자인 호랑이는 서울 곳곳에서 국가 제사에 쓸 가축부터 사람까지 잡아먹었다. 연구자들은 조선시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비율이 지금의 교통사고 사망률보다 높았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중종은 호랑이가 자꾸 서울에 나타나자 지방에서 호랑이 잘 잡기로 유명한 사람을 데려오기도 했다.

역사 속 서울은 야생동물 천국

한국교원대 김동진(역사교육) 박사는 “조선은 호랑이 다섯 마리를 잡으면 당상관 벼슬을 줬던 나라”였다고 말했다. 호랑이를 많이 잡은 수령은 특진시키고 호환이 일어난 고을의 수령은 파직하는 법까지 있었다. 호랑이 잡는 특수부대도 있었다.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은 조선인을 만나면 호랑이가 사람을 해친 이야기를 꼭 물었다. 최남선은 조선을 호랑이 이야기가 많은 나라라는 뜻에서 ‘호담국’이라 불렀다.

조선의 속담에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 없다’라는 게 있다. 조선에선 힘센 남자를 ‘인왕산 호랑이’라 불렀다. 인왕산 서쪽 자락의 무악재는 호랑이 출몰 명소였다. 행인들은 10명씩 모여 꽹과리를 치며 군사들의 호위 아래 겨우 고개를 넘었다. 서울에서 야생 호랑이가 출몰한 곳은 인왕산 골짜기만은 아니었다. 호랑이는 멀게는 수락산, 가깝게는 4대문 안에서도 어슬렁거렸다. 『조선왕조실록』은 남산·도봉산·수락산·북악산 등 서울을 두른 산부터 4대문 밖 청량리·제기동·아현동, 이화여대 뒷산, 숙명여대 근처 청파동에도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전한다.

호자도. 어미 호랑이와 새끼 세 마리를 그린 19세기 그림이다. 동그랗게 그린 눈이 익살스럽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호랑이는 공포의 대명사인 동시에 익살과 숭배의 대상이었다. [중앙포토]
서울의 호랑이 출몰 기록은 고려시대에도 있다. 공양왕은 서울로 잠시 수도를 옮겼다가 호랑이 피해가 너무 커 개성으로 돌아와야 했다. 실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엔 호랑이가 인왕산과 북악산에서 내려와 대궐까지 들어왔다. 호랑이가 높은 성벽과 굳센 성문을 어떻게 넘었는지는 당시에도 의문이었다. 호랑이는 대궐을 지키는 병사를 물어가기도 했고 삼청동, 종묘와 사직단, 창덕궁 소나무숲, 경복궁 후원에도 나타났다.

실록에서 호랑이가 처음 서울에 등장한 건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해다. 실록은 “호랑이가 서울에 들어오니 흥국리 사람이 (활로) 쏘아 죽였다”고 쓰고 있다. 태종 때는 호랑이가 밤을 틈타 왕의 집무실인 근정전 뜰까지 들어왔다. 세종은 가뭄이 들면 한강물에 호랑이 머리를 담가 비를 기원했다. 별명이 ‘큰 호랑이’였던 세조는 직접 호랑이 사냥에 나서기도 했다. 세조 13년. 북악산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제보가 들어오자 세조는 군사를 이끌고 직접 북악산에 올랐다. 호랑이는 낭떠러지 골짜기에 숨어 있었다. 세조는 활을 쏴 그 호랑이를 직접 잡았다.

연산군은 대성전에 호랑이를 가둬 놓고는 벽에 뚫은 구멍으로 활을 쏘곤 했다. 중종 땐 성문 근처에서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해 군사를 풀어 잡고 보니 사향 노루 두 마리였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중종 이후 잠잠하던 호랑이는 임진왜란 후 다시 출몰했다. 선조 때는 호랑이가 창덕궁에서 새끼를 낳았다. 선조는 “창덕궁 안에서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쳤는데 한두 마리가 아니다”라며 군사들이 “부지런히 찾지 않고 말만 꾸며 책임만 모면하려고 한다”며 화를 냈다. 인조 때는 인왕산에서 호랑이가 나무꾼을 잡아먹었다. 호랑이가 가장 기승을 부렸던 건 영조 때다. 실록은 영조 28년엔 서울에서 “호랑이가 마구 돌아다녔다”고 썼다. 영조는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신하들도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깊은 산골도 아닌 서울에 정말로 호랑이가 살았을까. “인구가 늘고 평지가 개간되면서 깊은 산으로 쫓겨간 것일 뿐 호랑이가 원래 산을 좋아하는 동물은 아닙니다.” 10년 넘게 한국 호랑이를 연구한 서울대 이항(수의학) 교수는 “오히려 펑퍼짐한 산과 넓은 들판, 큰 강이 흐르는 서울은 호랑이가 살기에 좋은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호랑이의 먹이가 되는 초식동물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 김동진 박사 역시 비슷한 지적을 했다. “한국 호랑이의 주요 서식지는 물이 많은 저습지였다. 서울이 딱 그렇다.” 그는 “저습지가 개간되면서 후기엔 호랑이가 살 곳을 잃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한국 호랑이는 아무르 호랑이로 분류된다. 아무르 호랑이는 일주일에 사슴·멧돼지 같은 큰 짐승 한 마리를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런 호랑이가 서울에 살았다는 건 호랑이의 먹이인 초식동물 역시 서울 근교에 많이 서식했음을 뜻한다. 실제로 조선 중기까지 4대문 밖은 울창한 숲이었다. 지금의 경북 상주시 인구(10만 명)와 비슷한 작은 도시였다. 울창한 숲과 높지 않은 산, 큰 강은 초식동물들의 안식처였고 표범과 호랑이 같은 포식자들을 불러 모았다. 세종은 겨울이면 군사들의 훈련을 위해 도성 근처 숲에서 노루와 사슴을 사냥하게 했다.

성종은 청계산에서 노루·사슴·멧돼지·토끼 등 25마리를 잡아 종묘에 바쳤다. 지금도 청계산엔 멧돼지와 너구리가 산다. 성종은 지금의 독립문 근처에서 여우 사냥을 구경하기도 했다. 표범은 성벽을 넘어 지금의 안국동까지 내려왔다. 조선시대 동대문 밖 숲은 태종이 자주 가던 매 사냥터였다. 태종은 매 사냥으로 잡은 고니를 태조 이성계와 정종에게 선물했다. 세종 역시 서대문 밖에서 자주 매사냥을 구경하곤 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천진기 민속연구과장은 “노루·삵·멧돼지 같은 작은 동물은 실록에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호랑이나 표범은 워낙 큰 동물이고 가끔 사람을 해치다 보니 실록에 기록했지만 작은 동물은 당시엔 너무 흔했다”는 것이다.

정조 이후 서울에서 호랑이가 출몰한 기록은 거의 사라진다. 조선 정부의 꾸준한 호랑이 사냥과 농지 개간으로 먹이가 줄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이 지나면 호랑이 서식지를 대부분 늑대가 차지한다. 최상위 포식자인 호랑이가 줄면서 늑대가 그 빈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실록에선 고종 때인 1868년 북악산 등에서 잡은 호랑이 다섯 마리가 마지막 기록이다. 그러나 호랑이가 서울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연세대를 세운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는 견문록에서 자신이 조선에 온 1888년 이후에도 서울에서 호랑이를 봤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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