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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선집’ 찍으려던 종이로 대입 시험지를 찍다

1977년 겨울의 대학입시장. 그로부터 20년간 1000만 명의 대학졸업자를 배출했다.
1977년 봄 세 번째 정계 복귀가 확정된 덩샤오핑(鄧小平)은 베이징 교외에 머무르고 있었다. 5월 24일 “지식과 인재를 존중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것은 교육과 과학의 발전이다. 지식을 존중하고 인재를 양성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현대화다. 국가 지도자의 가장 큰 의무는 인재양성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직접 모든 책임을 지고 담당하겠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67>

2개월 후 덩샤오핑은 4인방(四人幇)에게 쫓겨나기 전의 모든 직위를 회복했다. ‘과학 및 교육공작 좌담회’ 개최를 교육부에 지시했다. 참석자의 자격과 조건이 까다로웠다. “진정한 재능과 실학으로 무장된 사람이어야 한다. 허황된 이론이나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혁명이 뭔지도 모르면서 말끝마다 혁명이니 뭐니 해대며 되지도 않을 연합 타령이나 하는 사람들이 참석할 자리가 아니다. 식견이 풍부하고 할 말을 과감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엄선해라. 4인방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던 사람들은 배제시켜라.” 적합한 사람들을 찾기가 수월치 않았지만 그럭저럭 40여 명을 모을 수 있었다. 문혁 시절 ‘반동학술의 권위자’로 분류되거나 비슷한 낙인이 찍혔던 지식인들이었다.

회의는 8월 4일부터 5일간 계속됐다. 영문도 모른 채 좌담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당·정·군을 완전히 장악한 73세의 작은 노인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교육부장조차도 덩샤오핑이 직접 참석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도 판에 박힌 연설이나 발언을 하러 온 사람 같지가 않았다.

1977년 7월 세 번째 정계에 복귀에 성공한 덩샤오핑.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부도옹(不倒翁·오뚝이)이라고 불렀다. 김명호 제공
덩샤오핑은 매일 아침 회의 시작과 동시에 나타났고 마지막 발언이 끝나야 자리를 떴다. 순전히 들으러 온 사람처럼 행동했고 실제로 그랬다. 회의 내내 참석자들의 발언을 경청하며 잘못 알아 들은 부분이 있으면 다시 확인했다. 간혹 옆에 앉은 사람과 귀엣말은 나눴지만 남의 발언에 끼어들거나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한 번은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뜬 적이 있었다. “도저히 빠질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마치는 대로 돌아 오겠다. 그때까지 쉬도록 하자.”

참석자들은 기존의 결론 없는 회의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하라는 말을 믿고 말 한번 잘못 했다가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틀이 지나자 목소리들이 커지기 시작했다. 점점 거침없는 내용들을 토해냈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종래의 대학 신입생 모집 방법인 ‘추천제’의 성토장으로 변했다.

당시의 대학은 공농병(工農兵)대학이었다. 중졸 이상의 문화적 소양을 갖춘, 사상이 양호하고 신체가 건장한 20세 전후의 노동자·농민·군인이라면 소속 혁명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공농병 대학생들은 학교를 관장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통한 대학의 개조가 주 임무였다. 학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준도 천차만별이었다. 1976년 베이징대의 경우 2665명의 신입생 중 고교 졸업생은 171명에 불과했고 중학 졸업생이 2142명으로 제일 많았다. 초등학교만 나온 입학생도 79명이나 있었다.

칭화대 교수 한 사람의 입에서 “추천제로 들어온 학생 중 대다수는 중학교나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덩샤오핑이 말을 받았다. “그게 칭화중학이지 무슨 놈의 대학이냐. 대학은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다. 혁명가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다.” 우한대 화학과 교수 자취안싱(査全性)이 “입학시험을 부활시키자”며 열변을 토하자 다들 찬성했다. 덩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생각이 그렇다면 입시제도를 바꾸자. 당장 실시하자. 내년 여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77년 12월 중국 입시 사상 최초로 겨울에 대학입시가 실시됐다. 570여만 명이 응시해 27만 명이 합격했다. 시험용지가 부족했다. 마침 마오쩌둥 선집 제5권을 찍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종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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