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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야기는 사라지고 그림 이야기만 가득

연극 ‘광부화가들(The Pitmen Painters)’은 영국 극작가 리 홀 원작이다. 그의 출세작으로는 탄광촌 소년 빌리가 일약 발레 스타로 성공하는 이야기인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꼽힌다. 홀이 2년 전 발표한 ‘광부화가들’은 1930∼40년대 영국 미술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전설적인 광부예술집단 ‘애싱톤그룹’의 실화가 바탕이다. 비유럽권 국가에서 공연은 이번 한국이 처음이다. 중견 연출가 이상우 연출의 ‘광부화가들’은 원작과 약간 차이가 있다. 직접 번역도 한 이씨는 한국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도록 영국의 정치·문화·지역 등에 관한 내용은 많이 삭제했다고 한다. 대신 그가 취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정재왈의 극장 가는 길 - 연극 ‘광부화가들’, 30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아마 초등학교 교육밖에 받지 못하고 그림을 본 적도 없는 광부들이 직접 그림을 그리면서 예술에 대한 의미를 깨닫는 과정,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이들의 순수함과 의리에 마음이 더 끌렸으리라 짐작한다. 한데 ‘광부화가들’은 광부들의 진정성 대신 ‘그림들’이 중심 자리를 차지한 듯 해 아쉬웠다. 고정된 무대 세트 중앙에는 세 개의 스크린이 설치됐다. 이 스크린을 통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고흐, 피카소, 벤 니컬슨, 데이비드 존스 등 유명 화가들의 그림은 물론 리얼리티가 풍부한 애싱톤그룹의 그림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시간과 장소, 사건이 변할 때마다 친절한 자막이 따랐다.

자막은 ‘회의’ ‘헬렌의 정원’ ‘라이언의 교수실’ ‘기차역’ ‘갤러리’ 등 마치 작품의 제목을 닮았다. 자막에 맞는 그림은 광부인 조지(김승욱)와 지미(원창연), 올리버(윤제문), 치위생사 해리(이대연), 조지의 조카 꼬마(손성민), ‘미술 감상 교실’의 강사 라이언(권해효), 미술 패트론인 헬렌(문소리)의 모습과 겹치면서 그대로 무대에 재현됐다. 그 결과 마치 ‘광부화가들’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전시회를 감상하는 착각이 들었다.

이런 인물들의 모습에서 주급 3파운드도 못 받고 궁핍하게 사는 ‘광부들’을 발견하긴 쉽지 않았다. 그림을 판매하지 않은 이상(그들은 끝내 비상업예술에 집착한다) 경제적으로 나아지지는 않았을 텐데, 연극 속 그들의 행색은 이미 부르주아 화가의 전형적인 모습 같았다. 그건 해리가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표리부동이랄까. 연극은 스크린에 투영된, 그들이 직접 그린 그림 속 광부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던 것. 그들이 처한 고단한 현실을 말과 행동이 실린 연기가 아니라 자막과 그림이 대신함으로써 광부들의 존재감은 더욱 축소됐다. 올리버가 광부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의 전속 작가로 오라는 헬렌의 제안을 받고 느꼈을 심적 갈등은 지극히 표피적으로 그려졌다. 이 대목이야말로 광부와 화가, 가난과 부, 생활과 예술, 비상업성과 상업성 등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적인 맥락이 응축된 부분인 데 말이다.

평생 광부로 살아왔던 삶과 가족처럼 지내온 사람들과 헤어지고 그림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물 흐르듯 흘러갈 수 있는 것일까. 창작 공동체에서의 유대감을 망각한 채 말이다. 다른 예술매체, 특히 시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그림을 소재로 한 연극을 무대에 형상화하는 일이 쉽진 않을 것이다. 자칫 그림만이 부각되고 희곡의 진수는 희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벽을 ‘광부화가들’은 넘진 못했다. ‘광부’화가이어야 할 것이 광부‘화가’로 시점 이동하면서 감동을 동반할 만한 진짜 사람이야기는 증발하고 건조한 그림 감상 시간이 된 셈이다.

같은 탄광촌을 무대로 한, 같은 작가의 ‘빌리 엘리어트’가 만인의 공감을 얻은 명화 반열에 오른 것은 빌리가 로열발레단의 발레리노가 됐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정상에 오르는 ‘과정의 감동’이었다. 인생은 결과가 아닌 과정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연극 ‘광부화가들’은 역설적인 방식으로 환기시켜준 무대였다. 30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를 거쳐 LG아트센터 기획운영부장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서울예술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공연예술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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