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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탄생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의 모순

영화 ‘시’에는 이창동 감독의 고유한 그 어떤 것이 흐르고 있다. 많지 않은 그의 전작, ‘밀양’(2007), ‘오아시스’(2002), ‘박하사탕’(1999), ‘초록물고기’(1997)에서도 줄기차게 보이던 낯익은 것이다. 저런 곳에도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곳에서 고집스럽게 가치를 발견해내고, 통념과 편견에 젖어 맹목이 된 우리를 마침내 부끄럽게 만들고 마는 것이 이창동표 영화의 기이한 매력 아니었던가.

영화 ‘시(詩)’, 감독 이창동 주연 윤정희

영화에 나오는 어느 시인의 대사처럼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시를 품고 산다”는 말이 과연 옳은 것이라면, 이 명제는 사회적으로 가장 누추한 존재, 도저히 시가 깃들 것 같지 않은 그런 존재를 통해서도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 영화가 생활보호대상자이자 홀로 중학생 외손자를 키우기 위해 중풍환자의 간병인으로서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철 지난 여인, 종욱이 할머니(윤정희 분)를 통해 시를 풀어나가고, 결국 그녀한테 시를 깃들게 함으로써 이 감독은 또 한번 자신의 고유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시’는 이 감독이 작심하고 만든, 영화로 쓴 시론(詩論), 예술론(藝術論)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감독의 이런 의도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배우 윤정희의 빼어난 연기가 자리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어쨌든 이 감독이 보기에 시는 시인의 전유물이 아니며,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시인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사물과 교감하며, 다른 사람의 운명에 공감하고자 하는 열망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가슴에 시를 품을 수 있을 것이고, 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종욱이 할머니는 화사하고 멋을 부린 맵시 있는 옷차림을 좋아하고, 꽃을 보고 감격하며, 시를 쓰고 싶어 시 창작 교실에 다니며, 고달픈 일상의 틈새에서 시상(詩想)을 고민하는 소녀다운 감수성을 보여준다. 그녀는 차라리 늙은 소녀다. 그런 그녀에게 감독은 가혹한 운명의 길을 예비한다.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길이다.

그녀가 만일 시를 쓰려 하지 않았다면, 그녀도 주변 사람들처럼 일종의 마비에 가까운 무감각으로, 감당할 수 없는 타인의 불행과 자신의 수치를 그럭저럭 견뎌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타인의 불행과 자신의 수치에 공평하게 눈감지 않는 시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녀는 외손자를 대신해 타인-외손자가 가해자의 하나로 저지른 집단 성폭행을 당해 자살한 여중생-의 불행한 넋을 위로하기 위해 난생처음으로 지은 시 ‘아네스를 위한 노래’를 남기고, 자신-위자료 분담금을 마련하기 위해 늙은 자신의 몸을 돈 많은 또 다른 늙은 중증환자(김희라 분)에게 팔았던-의 수치를 속죄하기 위한 죽음의 길로 기꺼이 나아간다. 시인의 탄생이 뜻밖에 시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런 아이러니 속에는 삶의 속내가 지닌 불가사의한 모순이 언뜻언뜻 드러나 있다. 시인으로 살고 시인으로 죽었던 그녀, 어느 이름 없는 참된 시인에게 바치는 헌사가 바로 영화 ‘시’의 주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창동 감독의 신작 ‘시’는 영화로 그린 어느 이름 없는 참된 예술가의 초상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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