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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大 초대 총장 김창숙, 그가 있기에 조선 유교 500년 헛되지 않았다

“김창숙만 한 인물 있기에 조선 유학 헛되지 않았다.”
100번 꺾어도 꺾이지 않았던 민족지사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사진) 선생. 그는 종합대학 성균관대의 설립자이자 초대총장(1953∼56)이다. 해방 뒤 미 군정청은 경성제국대학을 국립서울대학교로 만든다. 반대운동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심산은 전국 유림인 대회를 소집, 성균관 내 친일파들을 숙청하고 대학 설립의 기초를 다진다.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명단에 유림 대표가 빠진 걸 천추의 한으로 여긴 심산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줄기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 와중에 두 아들과 전 재산을 역사에 바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만주 독립군조직의 군사부 고문을 지낸 그는 네 차례에 걸친 옥고로 앉은뱅이가 되고 만다. 벽옹(<8E84>翁:앉은뱅이 늙은이)이라는 호가 거기서 유래했다. 모진 고문에도 굴복할 줄 몰랐던 그는 감옥에서 일본인 전옥(典獄) 마야사키에게 절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무릇 절이라고 하는 것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나는 일본인 너희들에게 경의를 표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게 심산의 생각이었다. “포로로서 당당히 죽겠다”며 무료변호사도 거절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암흑기에 심산처럼 시종 곧은 절개를 지키기란 쉽지가 않다. 총독부 반대방향으로 집을 지은 만해 한용운, 허리를 굽히기 싫어 꼿꼿한 자세로 세수한 단재 신채호와 더불어 심산은 일제시대 ‘3절(三節)’로 불린다. 하지만 만해나 단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해방을 맞고 남북 분단이 계속되자 심산은 ‘통일이 아니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라’는 내용의 절창(『김창숙문존』)을 남겼다. 58년 이승만 대통령은 공병대에 명하여 김구·윤봉길·이봉창 등 일곱 열사의 묘를 이전하고 그 자리에 운동장을 조성하려 했다. 심산은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가서 ‘차라리 나를 죽이라’며 1인시위를 벌였다. 그 덕분에 축소된 형태로나마 지금의 효창공원이 유지될 수 있었다.

김창숙은 민족의 제단에 한 생애를 오롯이 바쳤다.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장에서 당시 박정희 국가최고회의의장은 ‘선각자이자 직언거사(直言居士)인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자’고 추도했다.

심산은 외세와 독재, 불의에 맞서 죽는 순간까지 꼿꼿하게 살았다. 나라가 깨지고 국민이 고통 받던 시절에 조백(<7681>白) 있는 그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외길인생이었다. 장례식장에 등장한 ‘백세의 사표, 천하의 법(百世師 天下法)’이라는 만장(輓章)이 그의 불굴의 삶을 웅변한다.

고은 시인은 ‘조선 유교 이만 한 사람 있기 위하여 500년 수작 헛되지 않았다’(『만인보1』,1983년)고 기록하고 있다. 2001년 김수환 추기경은 수유리 선생의 유택(幽宅)을 찾아 큰절을 올려서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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