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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65) 장위안치



▲장위안치는 쑹칭링과 함께 중공의 통전 대상 1호였다. 신정권 선포 직전 상하이 시장 천이(오른쪽 끝)의 안내로 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한 장위안치(앞줄 왼쪽 둘째)를 마오쩌둥이 텐탄(天壇)공원으로 안내했다. 이날 장은 마오에게 신정권 수립 이후에도 ‘상무인서관’ ‘중화서국’ ‘삼련서점’의 명칭이 존속될 수 있기를 청했다. 김명호 제공

장위안치, 황제에게 개혁의식 불어넣은 ‘출판의 황제’



장위안치(張元濟)는 25세 때 전시(殿試)에 합격했다. 6년간 경관(京官)으로 봉직하며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광서제(光緖帝)는 서구의 과학과 학술에 관심이 많았다. 툭하면 도서목록을 총리아문(總理衙門)에 건네며 구해오라고 했다. 베이징(北京)의 서점에는 황제가 원하는 책들이 드물었다. 조정(朝廷)의 대학자들에게 물어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장위안치만은 예외였다. 황제가 찾는 책들을 거의 다 소장하고 있었다. 황제는 총리아문에서 구해온 책을 펼칠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한결같이 같은 사람의 소장인(所藏印)이 찍혀 있었다. 장위안치라는 이름 석 자가 황제의 머리 한구석을 차지했다.



1898년 서태후(西太后)의 그늘에서 맥을 못 추던 황제는 개혁을 단행하겠다며 변법조서를 반포했다. 닷새 후 32세의 장위안치를 불렀다. 장은 신식 학교 설립과 각 분야의 인재 양성, 번역의 중요성을 진언했다. 젊은 황제는 간간이 한숨을 내쉬며 경청했다.



서태후는 청년 황제의 마지막 몸부림을 무산시켰다. 죽여야 할 사람은 죽이고, 쫓겨나야 할 사람은 내쫓았다. 동작 빠른 사람들은 해외로 도망갔다. 장위안치는 감옥에서 형장으로 끌려갈 날을 기다렸다. 평소 장을 눈여겨 보았던 리훙장(李鴻章)이 돼지고기 한 접시를 들고 찾아왔다. “너는 영원히 관직에 등용될 수 없다. 상하이로 가라. 네가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남양공학(상하이 교통대학의 전신) 설립자 성쉬안화이(盛宣懷)에게 보내는 편지를 던지듯이 건네고 자리를 떴다.



감옥에서 풀려난 장위안치는 한동안 베이징 거리를 거지처럼 헤맸다. “큰 건물이 통째로 무너지려 하지만 꿈에 취한 사람들은 깨어날 기미가 없다. 시신이나 다름없는 환자에게 온갖 약을 닥치는 대로 투입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평생 서로를 믿고 지지하고 이해한 차이위안페이(蔡元培)도 “고향에 내려가 훈장질이나 하겠다”며 한림원(翰林院)을 걷어치웠다. 두 사람은 같은 날 전시에 합격한 동기생이었다. 이후 50여 년간 장은 정치와 담을 쌓았다. 신해혁명 이후 슝시링(熊希齡) 내각의 교육총장직을 거절하고 1949년 1월 대리총통 리쭝런이 제의한 국공평화회담 국민당 측 대표직도 거절했다.



상하이는 별천지였다. 신식 학교는 물론이고 온갖 학회와 신문, 잡지가 난무했다. 장위안치는 남양공학 부설 번역원 원장에 취임했다. 첫 번째 작업이 린수(林<7D13>)가 번역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출간이었다. 이어서 총장에 취임했지만 오래하지 않았다.



1902년 장위안치는 4년간 몸담았던 학교를 떠났다. “귀천을 가릴 필요가 없다. 지혜와 우둔함도 중요하지 않다. 노소를 불문하고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교육의 혜택을 받아야 잠자는 사자가 깨어난다. 책은 많아도 교과서가 없는 나라가 중국”이라며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에 취직했다. 샤루이팡(夏瑞芳) 등 식자공 출신 인쇄기술자 4명이 5년 전에 설립한 출판사였다. 진사 출신인 당대 최고의 지식인과 식자공의 결합은 사람들을 의아케 하기에 충분했지만 두 사람은 1914년 샤가 암살 당하는 날까지 12년간 한 번도 충돌이 없었다.



1936년 상무인서관은 이사회 의장 장위안치의 칠순 행사를 준비했다. 낌새를 챈 장은 기를 쓰고 반대했다. 본인이 싫다고 우겨대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차이위안페이, 후스(胡適), 마인추(馬寅初), 황옌페이(黃炎培) 등 당대 각 분야의 대가 21명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논문을 부탁했다. 단 한 사람도 거절하지 않았다. 모두 신사상으로 무장된 전통학자이며 신도덕을 실천하는 노신사의 장수를 기원하며 경전급에 속하는 논문들을 보내왔다. 한결같이 학자와 사업가의 장점을 갖춘 장위안치에게 경의를 표했다.



지난 100여 년간 중국은 정부나 개인 할 것 없이 부(富)와 강(强)만을 추구했다. 정말 부득이하고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장위안치는 달랐다. 출판을 통해 국민 교육을 충실하게 하고 중국 문명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책을 좋아하고, 찾아 헤매고, 소장하고, 편집하고, 출판했다. 장의 이름 앞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중국 역사상 출판계의 제1인” “대변혁시기의 건설자” “중국의 지식인들을 오만하게 만든 장본인” 등이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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