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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만나 한국의 경제위기 극복 방안 듣고 싶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재정위기 몰린 영국, 구원투수로 등장한 캐머런 총리

자유민주당과의 연정 협상에 성공해 영국의 새 총리가 된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수가 12일(현지시간)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 앞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이번 연정은 모든 정파가 합심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 윈스턴 처칠의 전시내각(1940~45) 이래 65년 만이다. [런던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런던에서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지난해 3월 하순. 정권 교체를 노리던 보수당 관계자는 주영한국대사관에 긴급 요청을 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당수가 G20 참석차 런던을 방문하는 이명박 대통령을 꼭 한번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당시 주영대사이던 천영우 외교부 제2차관은 급히 서울로 연락해 면담 일정을 잡았다. 당시는 2008년 9월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맹위를 떨치던 때여서 경제문제가 캐머런의 주요 관심사였다. 천 차관은 “캐머런은 30분간 이 대통령을 만나 한국 경제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있는지 한국 경제의 대응 방안을 물었다”고 말했다. ‘한 수 배우겠다’는 자세로 경청하던 게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영국호(號)의 새 선장이 된 캐머런(43). 그는 일찍부터 보수당 집권 뒤 최대 과제가 경제를 살리는 일임을 잘 알고 있다. 이번 총선도 잇따른 금융위기로 영국 경제가 침체를 겪는 상황에서 치러져 재정적자 감축, 세수 증대, 일자리 창출 대책 등이 주요 이슈였다. 따라서 영국 유권자들이 보수당을 제1당으로 선택한 것은 캐머런에게 영국이라는 부실기업을 되살릴 개혁을 주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년 전 캐머런이 보수당이라는 부실회사를 인수해 지지도 1위 정당으로 만드는 개혁에 성공했듯 다시 한번 쇠약해지고 있는 ‘주식회사 영국’을 살려내는 CEO가 되라고 주문한 것이다.



천영우 당시 주영대사 통해 메시지 전달



캐머런은 2005년 말 보수당 당수 경선에서 39세의 젊은 나이로 당선돼 일약 영국은 물론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정치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캐머런의 당선은 집권 노동당에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당이 차기 총선에서 노동당을 누르고 정권 교체를 이루는 데 캐머런의 지도력과 이미지가 크게 기여할 것이란 전망이었다. 이 예측은 5년 후 그대로 적중했다.



보수당은 선장이 바뀐 직후부터 여론조사에서 집권 노동당을 앞섰다. 여론조사기관 ICM이 ‘내일 선거가 실시되면 어느 당 후보를 지지할 것이냐’고 묻는 설문조사(2005년 12월)를 한 결과 보수당이 37%, 노동당이 35%를 기록했다.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이 노동당을 앞지르기는 2000년 9월 석유위기 때 한 달간을 빼고는 1993년 1월 이후 처음이었다. 전적으로 ‘캐머런 효과’ 덕분이라는 게 당시 영국 언론의 분석이었다.



캐머런은 이후 4년 반이라는 세월 동안 보수당의 CEO로서 ‘지속가능 경영’을 해왔다. 2008년 5월 노동당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띤 지방선거에서는 압승을 거뒀다. 당시 보수당은 44%의 득표율로 24%를 득표한 노동당을 20%포인트나 앞섰다. 당수 당선과 동시에 정당 지지도를 집권당보다 2%포인트 앞서게 만들었던 캐머런이 2년반 만에 그 격차를 20%포인트로 벌리며 ‘순익 10배’의 기업으로 만든 것이다.



이달 초 실시된 총선에서도 경제살리기에 대한 6100만 영국인의 열망이 그대로 드러났다. 여론조사기관 유고브가 총선 보름 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노동당·보수당·자유민주당 세 당수 중 누가 정부 부채를 줄이는 데 가장 믿을 만한 인물인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34%가 캐머런을 꼽았다. 자유민주당 닉 클레그 당수는 21%로 2위를 차지했다. 당시 총리였던 고든 브라운은 18%를 얻어 꼴찌였다.



선거 기간 중 캐머런이 보여준 위기관리 능력도 그가 가진 ‘CEO의 끼’를 보여준다. 지난달 15일 실시된 제1차 TV 토론에서 캐머런은 혜성 같이 나타난 클레그 당수에게 일격을 당했다. 5년간 공들인 탑이 무너질 수 있는 최대 위기의 순간이었다. 클레그가 이끄는 자유민주당은 정당 지지도가 치솟기 시작하더니 제2차 TV토론 직전인 20일에는 집권 노동당을 제친 데 이어 부동의 1위를 달려온 보수당까지 따돌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선거라는 것이 막판 바람에 휩쓸리면 결과를 돌이키기 어렵다. 하지만 바로 이 위기의 순간에 실시된 2차 토론에서 캐머런은 침착하게 ‘총리감’의 면모를 과시해 클레그 돌풍에 제동을 거는 데 성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캐머런은 마지막 3차 토론에서 승리하고 이를 총선 승리로 연결했다.



캐머런은 영국 주류 명문가 출신이다. 그의 가문에서는 저명한 보수당 의원 세 명이 배출됐다. 캐머런은 찰스 왕세자, 윌리엄·해리 왕자와 함께 런던 상류층 사교계의 신사 모임인 ‘화이츠(White’s)’의 회원이다. 혈통을 따지면 엘리자베스 여왕과도 먼 친척이다. 윌리엄 4세의 혼외 딸이 그와 같은 가문이기 때문이다.



부실 보수당 인수해 ‘우량기업’으로



캐머런은 형 알렉과 누이 타니아·클레어와 함께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 이언은 부동산회사를 잠시 경영한 뒤 주식 브로커가 됐다. 캐머런의 정치적 혈통은 모계에서 내려온다. 모계 5대조 할아버지인 윌리엄 마운트는 19세기에 도버해협에 있는 와이트 섬에서 보수당 의원으로 선출됐다. 증조부인 윌리엄 마운트 경은 준남작 세습 위계를 받았다.



캐머런은 사립 상급 초등학교 시절부터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7세 때 최상류층 자제들이 들어가는 사립 상급 초등학교인 히더다운 스쿨에 입학했다. 전교생이 80명밖에 되지 않는 학교였다. 캐머런은 이곳에서 2년 먼저 이 학교에 입학한 에드워드 왕자와 3년간 함께 공부하며 친구가 됐다. 억만장자 석유재벌 존 폴 게티의 손자인 피터 게티도 만났다. 그와 친하게 지낸 덕에 10세밖에 되지 않은 캐머런은 콩코드기를 타고 게티 가족의 샌프란시스코 별장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더 메일 온 선데이는 “77년 여름, 대부분의 초등학생이 박물관 여행만으로도 만족하던 시절에 캐머런은 다른 네 명의 학교 친구들과 함께 게티 가족으로부터 3주간 초대받아 엄청난 여행을 할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사립 상급 초등학교를 마친 캐머런은 79년 가문의 전통에 따라 이튼 스쿨에 입학했다. 캐머런은 이튼 스쿨 시절에 대해 “고2 때까지는 성적이 썩 좋지는 않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대입시험인 A-레벨에서는 역사·예술사·정치경제학 3과목에서 A를 받았다.



옥스퍼드에 입학하기 전 그는 한 해를 쉬었다. 그 기간 중 그는 잉글랜드 남동부 서섹스주의 팀 래트본 의원 사무실에서 일했다. 홍콩에도 석 달간 체류하면서 해운회사에서 근무했다. 이후 모험심을 기르기 위해 기차를 타고 소련과 동유럽을 다녔다.



옥스퍼드대학 친구인 스티브 래트본은 “캐머런은 정치보다 재미있는 학창 시절을 보내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캐머런은 당시 테니스 팀 주장도 맡았다. 그리고 폭음과 악습으로 유명한 옥스퍼드 쾌락주의자의 사교 모임 ‘불링던 클럽’의 회원이기도 했다. 턱시도와 비슷한 정장을 입고 파티를 즐기는 모임이다. 더 메일 온 선데이는 “캐머런에게 옥스퍼드에서의 생활은 한 편의 무도회였다”고 전했다.



준수한 용모의 캐머런은 사교 모임에서도 늘 인기가 좋았다. 당시 멤버였던 팀 머피는 캐머런에 대해 “정말 인기가 좋았고 최고로 멋진 사나이로 꼽혔다”며 “그 덕에 대학 시절을 아주 멋있게, 마음껏 즐겼다”고 말했다. 캐머런의 은사인 버논 보그다너 옥스퍼드대학 교수는 “가장 능력 있는 학생 중 한 명이었고, 온건하고 분별력 있는 보수적 정치 시각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대학에서 1등급 졸업 학위(first class honours degree)를 받은 뒤 캐머런은 보수당 정책연구소에 들어갔다.



엘리자베스 여왕과도 먼 친척



하원의원을 목표로 했던 캐머런은 의원이 되려면 정치권 밖에서 경험을 쌓는 것이 필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마이클 하워드 당시 내무장관의 고문으로 잠시 일한 뒤, 상업텔레비전 방송사인 칼턴에 들어가 홍보 분야에서 일하며 사회 경험을 쌓았다. 캐머런은 칼턴에서 기업 홍보 책임자로 7년간 일했다. 이때 그는 마이클 그린 칼턴 회장을 수행해 세계를 여행했다. 그린 회장은 캐머런의 박식함과 치밀함을 빗대 그를 “회의 자료(meeting handouts)”라고 칭찬했다.



캐머런은 97년 총선 때 스태퍼드에서 낙선의 쓴맛을 봤다. 하지만 2001년 옥스퍼드 인근 위트니에서 다시 보수당 후보로 출마해 의회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당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예비 내각의 교육부 장관, 하원 부의장, 보수당 부당수를 역임했다.



그의 부인 서맨서(39)는 대지주 레지널드 셰필드 경의 딸로 찰스 2세의 후손이다. 서맨서의 계부 애스터 자작은 존 메이저 내각에서 방송 담당 장관을 지냈다. 서맨서는 런던의 명품 문구점 스마이슨의 고위 간부다. 브리스톨에서 예술학교를 졸업한 서맨서는 발목에 문신을 새길 정도로 독특한 취향을 갖고 있다. 서맨서와 절친한 사이였던 캐머런의 누이 클레어가 두 사람을 소개해 96년 결혼에 골인했다. 3명의 자녀를 뒀던 캐머런은 지난해 간질을 앓던 6세의 장남 이반을 잃었다. 그런데 올 3월 부인 서맨서의 임신 사실이 알려졌다. 부부의 아픔을 기억하는 유권자들은 서맨서의 임신 소식에 기뻐했다.



재정위기에 몰린 영국은 캐머런이라는 구원투수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그가 총선에서 과반 의석에 못 미치는 승리를 거둔 데 대해 ‘영국 국민들이 그의 능력에 대해 아직 의문부호를 거두지 않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캐머런이 그동안 총론만 말했을 뿐 각론을 내놓은 게 없다는 비판도 들린다. 영국의 보수 언론들조차 그를 난세를 구할 구원자로 보지는 않고 있다. 성(城)을 공격할 때와 성을 지키는 것은 전혀 다른 능력을 필요로 한다. 노동당 정권을 비판해온 그가 경기침체라는 괴물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이제는 캐머런이 정말 뭔가를 보여줘야 할 때다.



박경덕·김수정 기자 poleey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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