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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 재즈의 그윽한 울림, 심장 깊숙한 곳 자극

흔히 재즈에서 혼(Horn) 악기를 입으로 불어 연주하는 건, 혼(魂)을 불러내는 아주 근사한 원초적 의식이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길어올린 영혼의 숨결을 후후훅~ 하며 사운드로 토해낸 그 맛이라니. 색소폰, 트럼펫, 트롬본 등 취주악기라면 다들 매력덩어리지만, 그중에서도 ‘황홀한 황동빛 여체’ 색소폰에 나는 그만 마음 전부를 빼앗기곤 한다. 대개는 테너 색소폰에.

박진열 기자의 음악과 '음락'사이 - 스탠 게츠 ‘At the Shrine’(1954)

1940년대 후반 모던 재즈의 출발점인 밥(Bop), 쿨(Cool) 동네엔 귀공자풍의 백인 테너 색소폰 주자, 스탠 게츠(Stan Getz·1927~91)가 있었다. 어느 해 늦겨울인가, 쉬는 날이면 나는 내처 스탠 게츠만 들었다. 특히 50년대 초 Roost 레이블 시절의 명반들. 그냥 좋았다. 화상 입을 정도로 뜨거운 테너 연주라면 그한텐 없다. 소니 롤린스나 존 콜트레인 류의 그 불덩이 말이다.

게츠의 필살기는 깃털처럼 가벼운 블로윙으로 나긋나긋 펼쳐가는 프레이즈다. 설렁설렁 멜로디 라인을 밟아가는 듯하지만 그 투명하고 보드라운 소리의 빛과 결에는 천 가지도 넘는 풍경이 깃들어 있다. 가슴 저미는 아름다운 수심까지 알알이(짐짓 낙천적인 사람 중엔 남이 눈치챌까 영 부끄러운, 깊은 상처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스탠 게츠 또한 그랬다. 알코올과 마약의 덫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했으니).

나의 은밀한, 스탠 게츠 애청 음반은 바로 이거다. 54년 11월 8일 LA의 슈라인 오디토리움에서 공연한 ‘At the Shrine’. 별별 재주를 부리지 않는데도 손 닿지 않는 심장의 깊숙한 언저리까지 스멀스멀 스며드는 뽀얀 테너 음색, 참 그윽하다. 밸브 트롬본(보통의 슬라이드 트롬본에 비해 간단한 구조)의 명수, 밥 브룩메이어와 주거니 받거니 빚어내는 영감 역시 뭐라 말할 수 없이 멋지고. ‘Polka Dots And Moonbeams’ 트랙은 진저리쳐지는 달콤함이다. 비브라토 없이 경쾌한 공명으로 밥 재즈의 현란함을 눙치는, 통제된 격렬함이랄까. 듀크 엘링턴의 ‘It Don’t Mean a Thing’ 같은 업템포 곡에서도 그는 결코 성마르게 재촉하는 법이 없다.

로큰롤에 앞서 웨스트 코스트 재즈(혹은 쿨 재즈)는 원래 자신의 뿌리인 중산층에 대한 반란을 꿈꾸던 당대 백인 젊은이들의 음악 방식이었다. 다소 뜬금없지만 이건 마치 60년대 뉴욕에서 반(反)문화 비트 세대의 우두머리격인 록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전위적인 불협화음으로 기성세대에게 침을 뱉었던 것과 흡사하다(히피족보다 비트족이 먼저다!).

슬슬 후텁지근해져 기분까지 후줄근해지는 오뉴월이면 무수한 그의 음반 중에서도 자주 손이 가는 게 여럿 있다. ‘Jazz Samba’ ‘Getz/Gilberto’ ‘Getz Au Go Go’ 등등 보사노바(‘새로운 경향’이란 뜻) 연작들인데 사실 언제 들어도 짜릿하다. 해풍을 머금은 삽상한 보사노바 리듬에 귀를 맡기노라면 나는 어느새 브라질의 이파네마 해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아, 그가 세상 떠나기 석 달 전 토해낸 마지막 고해성사를 빼먹을 순 없지. 라이브 앨범 ‘People Time’에서다. 피아노(호암아트홀 무대에서 뵈었던 그리운 얼굴, 케니 배런)와 단둘이서다. ‘First Song(For Ruth)’ 곡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쿨럭쿨럭 게워내는 끈적이는 테너, 먹먹하고 10분은 너무 짧다. 해서 나는, 스탠 게츠라고 쓰고, 불멸의 아름다움이라고 읽나 보다.

박진열 기자



정규 음반을 왜 앨범이라고 할까. LP판을 왜 레코드라고 할까. 추억의 ‘사진첩’이고,‘기록’이기에 그런 거라 생각하는 중앙일보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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