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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미는 볼펜이 아니다 모든 쓸 것은 모나미가 된다”

이데아는 사물의 원형이다. 플라톤은 육안이 아니라 영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이라고 말했다. 모든 실재하는 사물은 그 사물의 이데아를 본떠 이뤄진다. 볼펜의 이데아는 뭘까. 서양인들에게는 ‘빅(Bic) 크리스털’이다. 1950년 탄생 이래 1000억원어치 넘게 팔렸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초당 57자루가 팔리는 베스트셀러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볼펜의 이데아는 ‘모나미153볼펜’이다. 하얀색 육각주 모양의 자루에 검은색 머리 부분이 특징이다. 63년 5월 1일 첫선을 보인 이래 34억 자루가 팔렸다. 이를 늘어세우면 지구를 열 바퀴가 넘는 길이가 된다.

창립 50주년 맞은 모나미 송하경 사장

모나미가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두 차례 석유파동과 90년대 말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를 견뎌 낸 몇 안 되는 회사다. 그런데 ‘아무도 손으로 쓰지 않는 시대’가 모나미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샴쌍둥이다.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만들겠다는 송하경(51) 사장을 만났다.
 
“볼펜 하도 많이 뺏겨 안 갖고 다녀”
궁금했다. 그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어떤 펜이 꽂혀 있을지.
“없어요. 하도 주변에서 ‘너는 볼펜회사 사장이니까 많을 거 아니냐’며 들고 다니는 걸 뺏어 가 안 가지고 다녀요. 제가 오히려 빌려 쓰지.”

대답은 예상을 한참 빗나갔다. 국내 최대 문구회사를 이끌고 있으니 당연히 자기네가 만든 ‘값싼’ 볼펜을 가지고 다닐 것 같았다. 한편으로 최고경영자(CEO)란 직위의 무게를 생각하자니 고급 명품 만년필을 쓸 것도 같았다. 그런데 둘 다 아니란다.

질문을 바꿨다. 모나미 사장이 제일 좋아하는 필기구는 뭔지.
“플러스펜요. 처음 쓸 때의 그 뾰족한 느낌. 뭔가를 새로 시작할 때의 상쾌함과 비슷하달까…. 가끔 대통령들이 집무실에서 일하는 사진을 찍은 걸 보면 그분들도 플러스펜을 쓰고 계시더라고요.”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에 가벼워 많이들 이용하는 게 플러스펜이다. 금방 닳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자판기 커피 값에도 못 미치는 ‘착한’ 가격이어서 부담이 없다.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쓰는 것’과 관련된 많은 물건을 모나미가 만든다. 사인펜·네임펜·매직·보드마커 등은 물론이고 지금은 기억도 희미한 붓펜도 모나미에서 나온다(어르신들이 제사 축문을 쓸 때 많이 쓰는 붓처럼 생긴 펜이다). 아직도 매니어층이 있단다. 전보다 잉크가 적어진 것 같다며 모나미 본사로 항의 전화를 걸어오기도 한다. 사무실에서만이 아니다. 조선소에서는 모나미에서 만든 페인트마커를 쓴다. 기름이 묻어 잘 써지지 않는 쇠 위에 잘 표시돼서다. 자동차 공장에서 주로 쓰이는 물을 뿌리면 지워지는 스틸펜도 모나미가 만든다. 아직 시중에는 안 나와 있지만 성형외과에서 얼굴에 수술 부위를 표시할 때 쓰는 소독이 되고 지워지는 펜도 개발했다. 선거 자동 개표기용 잉크도 모나미가 만든다. 쓰는, 거의 모든 것의 ‘배후’에는 모나미가 있다.

“가끔 유언장 분쟁이 붙었을 때 (모나미로) 연락이 오기도 합니다. 언제 만들어진 유언장인데, 그때 쓴 잉크가 당시 사용하던 잉크가 맞는지 알아봐 달라는 식이죠. 괜히 잘못했다가 패소당한 쪽에서 소송해 오면 어떡하나 싶어 공식적으로는 안 해 줍니다. 그렇지만 그런 걸 물어오는 걸 보면 다들 모나미를 전문가라고 인정한 거죠.”

모나缺� 인기는 해외에서도 확인된다. 현재 100여 개국에 연 2000만 달러를 수출하고 있다. 1위 수출 국가는 문구 용품의 종주국인 일본이다. 일본에서도 모나미가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다. 플러스펜은 중국에서 인기를 끌어 이후 ‘짝퉁’이 20여 개나 쏟아졌다. 터키에서는 크레파스 시장의 80%를 ‘왕자파스’가 점하고 있다. 향수 마케팅을 할 요량으로 국내에서 내놨는데 안 팔려 재고가 쌓이자 버리는 셈치고 터키에 수출한 게 대박이 났다.

대박은 그러나 공짜로 얻어진 게 아니다. 바탕에는 품질이 있다. 볼펜(문구) 만드는 실력은 최고라고 자신한다. 전 세계에서 빅이 볼펜 시장의 과반을 점하지 못한 드문 나라다.
“기술력만 보면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습니다. 일제랑 비교해도 그렇죠. 뒤지는 게 있다면 디자인과 디테일인데 이건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겁니다. 신경 쓴 만큼 값이 비싸지니까요.”

이런 자신감이 녹아 있는 게 다음 달 나올 신제품 ‘FX제타’다. 153볼펜의 뒤를 이을 베스트셀러를 기대하고 있다. 중성펜처럼 잉크 찌꺼기가 없으면서도 유성펜처럼 오래 사용할 수 있다. 실제 사용해 보니 정말 부드럽게 써지면서 일명 ‘볼펜 똥’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품질의 볼펜을 만들 수 있는 곳은 일본에서도 미쓰비시 정도 말고는 없어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가능성이 큰 제품이죠. 좋다고 너도나도 만들어 팔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에요. 볼펜에 대한 개념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고 할까요.”

“모바일 오피스 동반자 될 것”
모나미 반세기는 평온했다. 다른 사업에 한눈팔지 않고 한 우물을 판 결과다. 사업 초기에는 수입 학용품 금지와 국산품 애용 운동으로 덕을 봤다. 정부에서 알아서 보호막을 쳐 주니 사세(社勢)는 날로 커졌다. 74년 주식시장 상장이라는 복병을 만나기도 했다. 무자료 거래가 대부분이던 시절, 상장을 하면 거래 자료를 모두 공개해야 한다. 감춰 뒀던 수입이 노출될까 두려워하던 도매상들이 모나미에 등을 돌렸다. 위기를 맞는 듯했지만 탁월한 제품 덕에 떠났던 도매상들이 제 발로 돌아왔다. 78년에는 성수동 공장에 불이 나 볼펜 만드는 데 중요한 기계가 탔다. 다행히 기계도 고쳐 쓰고 보험금도 받아 전화위복이 됐다. 10대 그룹도 쓰러져 간 90년대 말 외환위기를 모나미는 ‘별일 없이’ 넘겼다. 월급이 줄었다고 볼펜을 안 쓰지는 않는다.

그런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잽’을 맞았다. 많은 중소기업을 도산으로까지 몰고 갔던 ‘키코(KIKO·Knock in knock out)’ 얘기다. 예상과 달리 환율이 급등하면서 43억원의 환손실이 났다. 1년간 장사해 번 돈을 고스란히 날리게 됐다. 송 사장은 비슷한 피해를 본 다른 중소기업들과 연대해 주거래 은행과 소송 중이다.

“1년 동안 헛장사한 꼴이죠. 그렇다고 키코가 (모나미의) 핵심 경쟁력에 타격을 준 건 아닙니다. 과거는 과거죠. 키코가 (모나미의) 미래에 영향을 줄 것도 없습니다. 혹시 재판에서 조금이라도 건지면 그건 그대로 순이익이 되겠죠. 우리는 물론이고 다들 세게 데어 키코 같은 건 안 들 겁니다. (모나미는) 해외 공장도 있고 수입과 수출 물량이 비슷해 자체 헤징이 되거든요.”

키코를 잽이라고 한 건 진짜 문제가 아니어서다. 회사를 휘청이게 만들 ‘펀치’는 시대의 변화다. 아무도 손으로 쓰지 않는 시대. 이제는 약속도 수첩이 아니라 스마트폰에 입력한다. 분필 가루가 날리던 진녹색 칠판은 전자칠판으로 대체됐다. 편지는 e-메일이 접수한 지 오래다. 사무실에서는 전자서류가 오간다. 아이패드가 공급되면 책까지 사라질 판이다. 쓸 일이 없게 됐다. ‘문구회사 모나미’의 미래는 어둡다. 산업현장에서 쓰이는 전문가용 필기구가 있기는 하지만 시장 규모가 워낙 작아 여기만 바라보고 회사를 끌고 가기엔 무리다.

이런 모나미의 미래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주가다. 모나미 주가는 정보기술(IT) 버블이 한창이던 2000년 9월 4000원(증자, 액면분할 등을 감안한 수정 주가)을 돌파한 뒤 하락했다. 이후 다시 상승과 하락을 반복해 주가는 현재 1700원 선에 머물고 있다. 지난해 모나미의 매출액은 2175억원, 영업이익은 65억원. 2008년에 비해 매출액은 6% 늘고 영업이익은 35% 줄었다. 영업이익이 준 건 키코 여파라지만 보통 때도 매출액 영업이익률은 5%에 못 미쳤다. 1000원 팔아 50원도 못 남긴다는 의미다. 자산·매출·이익 규모에 비해 주가가 저평가됐다는 것이 송 사장의 주장이지만 시장은 냉정하다. 주가는 꿈을 먹고 자란다. 모나미의 꿈은 희미하다.

모나미와 비교할 수 있는 글로벌 볼펜회사가 빅이다. 빅의 문제의식도 모나미와 다를 바 없다. 빅은 잘하는 걸 더 잘하자는 전략으로 문제를 풀고 있다. 빅의 정신은 ‘가장 싼값으로 팔기 위해 가장 싸게 만든다’이다. 빅이 잘하는 것은 플라스틱 사출(틀에 재료를 부어 원하는 모양을 찍어 내는 것)이다. 이쪽으로 집중했다. 9000여 개에 이르던 상품을 문구·라이터·면도기 등 3개 상품군 150개로 정리했다(앞서 빅이 내놓은 속옷은 최근 미국 재테크 전문지인 월렛팝이 선정한 ‘역대 최악의 상품’으로 꼽혔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효율적으로 더 싸게 만들 수 있게 됐다. 제한된 상품군 안에서 신제품도 꾸준히 내놨다. 삼중 면도날 면도기, 바비큐용 라이터 등이 그 예다. 일명 ‘미래를 창조하며 과거를 영예롭게(honour the past while inventing the future)’이다. 2008년 초 30달러 선에 머물던 주가는 현재 60달러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모나미의 전략도 빅과 닮았다. 잘하는 걸 잘하자는 것이다. 모나미의 강점은 물론 제조다. 핵심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다른 문구회사 ‘바른손’이 부도나고 ‘문화’가 브랜드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동안 모나미는 살아남았다. 경쟁자가 사라진 시장에서 전리품을 챙길 차례다. 그러나 문구 시장이라는 땅 자체가 황폐화되고 있다. 그런 땅에서 누릴 만한 전리품은 별로 없다.

모나미에는 제조 말고 유통이 있다. 유통 노하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무형의 기업 자산이다. 전국 수만 개의 문구점을 훑고 다닌 모나미의 유통망은 치밀하고 조직적이다. 지금도 재무제표를 뜯어보면 매출의 70%가 유통 부문에서 나온다. 취급 상품도 단순 문구류가 아니라 사무실에 들어가는 모든 사무용품을 취급한다. 현재 법인 사무용품 납품에서 국내 1위다. 하루 5000건의 주문을 처리한다. 서울은 당일 발송, 지방은 그 다음 날까지 배달해 준다. 배송 직원들은 모두 개인휴대단말기(PDA)로 무장돼 있다. 실시간으로 주문과 배송 정보를 확인한다. 시간과 동선이 줄어드니 고객 만족도가 높아진다. 이런 유통 노하우를 알아본 휼렛패커드(HP)는 95년부터 모나미를 통해 잉크카트리지 등 프린트 소모품을 판매하고 있다. 2000년에 유통 브랜드 ‘오피스플러스’를 만들었고, 2007년 12월에는 사무용품 편의점 ‘모나미스테이션’(현재 14개 점포)을 열었다. 2005년에는 증권거래소 업종을 제조업에서 유통·도매 쪽으로 바꿨다.

“궁극적으로는 모나미가 모바일 오피스 구현의 동반자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 있는 홍길동이 내일 부산 조선호텔에서 오전 9시에 고객 20명을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PT)을 한다고 칩시다. 준비할 게 많겠죠. 그런데 모나미가 있으면 이걸 한 번에 해결해 준다는 거죠. 홍길동이 오후 10시까지 PT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그럼, 그 원자료를 ‘디자인팩토리(모나미의 디자인·출력 전문회사)’에 보냅니다. 디자인팩토리가 원자료를 그럴듯하게 가공해 부산에 있는 모나미스테이션에 보내죠. 거기서 출력해 오전 9시까지 조선호텔 미팅룸에 21부를 가져다주는 겁니다.”

문구 유통의 노하우가 쌓이다 보니 모나미에는 여기저기서 팔아 달라는 주문이 들어온다. 얼마 전 시작한 개 사료 유통도 그렇다. 국내에서 최고로 많이 팔리는 ‘사이언스 다이어트’라는 사료업체가 모나미에 총판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중 개 사료 부문만 맡았는데 그것만 해도 연매출이 100억원이 된다. 앞으로도 연매출 100억~300억원 규모의 외국계 회사 총판 유통을 적극적으로 맡을 계획이란다. 이 정도 규모에는 유통 전문 대기업이 손을 대지 않는다. 그렇다고 개인에게 맡기기에는 외국계 회사로서는 위험 부담이 크다. 딱 모나미에 적합한 일이다.

변신을 위해 최근 안산 공장을 매각하기로 했다. 공장 설비는 대전 등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거기서 받을 돈으로 경기도 분당 본사 옆에 있는 조달청 물류센터를 362억원에 사들였다. 유통 부문을 강화해 2015년 매출 1조원, 영업이익 500억원을 달성한다는 목표다.
“많은 사람이 문구사업이어서 전망이 어둡지 않느냐고 물으면 저는 되묻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문구는 뭐냐고요. 볼펜만이 문구가 아닙니다. ‘쓰는 행위’라고 생각하면 복사기·프린터도 문구이고, 컴퓨터도 문구입니다. 스마트폰도 문구가 되고요. 그러면 시장 규모가 어마어마해지죠. 그런 문구 유통 노하우를 잘 살리면 됩니다. 현재 모나미와 계열사를 합친 매출이 5000억원 정도 됩니다. 매년 15%씩 성장하면 2015년 매출 1조원은 꿈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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