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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66>‘기업가 시인’ 김광균

“그가 기업에 투신하지 않고 계속 시업에 몰두했더라면 우리나라의 현대시문학사는 얼마간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문단에서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 가운데서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와사등’의 시인 김광균 이야기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시집을 내기도 하고 몇 편의 신작시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김광균은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된 동생이 운영하던 무역업체 ‘건설상회(후에 ‘건설실업’으로 개명)’를 떠맡아 중견기업으로 키우면서 ‘시인의 꿈’은 실질적으로 접은 셈이었다. 하지만 20여 년에 걸친 시작 활동만으로도 그는 한국 시단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시인이었다.

1914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난 김광균은 보통학교에 다니던 12세 때부터 중외일보 등 여러 신문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송도상고를 졸업하고 고무공장에 취업한 뒤 그는 본격적인 시업의 길에 들어섰다. 현상문예나 추천 등 공식적인 등단 경로를 밟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들은 발표될 때마다 문단의 시선을 끌었다. 35년 김광균은 이육사·서정주·신석초 등과 함께 ‘시인부락’ ‘자오선’의 동인활동을 펴면서 시단에 확고한 자리를 구축했다. 같은 해 연말 김기림이 그해의 시단 총평을 하면서 감광균을 ‘유망 신인’으로 소개한 것이 그의 재능을 널리 알리는 계기였다. 당시 김기림은 ‘모더니즘의 기수’로 꼽히고 있었고, 그에 따라 김광균은 그 대를 잇는 ‘신세대 모더니스트 시인’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김광균의 나이 겨우 20대 초반이었다. 김기림·백철 등 비평가들은 ‘청각조차 시각화하는 기이한 재주’ 또는 ‘무형적인 것을 유형화하는 능력’ 따위의 표현으로 김광균을 높이 평가했다. 이런 평가에 걸맞게 김광균은 줄곧 ‘시는 곧 회화다’는 이론을 전개하면서 시에 있어서의 회화적 이미지를 중시하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발표했다. 39년 출간된 첫 시집 ‘와사등’과 47년 출간된 두 번째 시집 ‘기항지’는 그와 같은 김광균의 시적 경향과 특징이 잘 나타난 시집이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그의 시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김광균이 떠맡은 ‘건설실업’은 성장을 거듭해 60년대에 이르러서는 중견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무역협회 부회장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고, 70년대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이사직을 맡기도 했다. 그의 시적 재능을 아까워한 문단의 친구들은 틈틈이 시를 쓰라고 권유했지만 김광균은 그때마다 기업 경영과 시작 활동을 병행할 수 없는 어려움을 토로하곤 했다. 출판사를 운영하던 동갑내기 시인 장만영은 그에게 시적 자극을 주기 위해 57년 세 번째 시집 '황혼가'를 펴내주기도 했다.

비록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시에 대한 애정마저 식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시를 찾아 읽었고, 틈날 때마다 문단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77년 김광균은 그가 발표한 작품들을 모두 모아'김광균 시전집-와사등'을 펴내면서 한국 문단을 위해 뭔가 뜻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평양 출신의 후배시인 박태진(그 역시 일찍이 실업계에 투신한 모더니스트 시인이었다)과 상의한 끝에 작고한 문인들의 문학비를 세워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비용은 물론 전액 김광균의 부담이었고, 비석으로 쓸 돌도 돌 공장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골랐다.

처음 세운 문학비가 75년 세상을 떠난 절친한 친구 장만영의 시비였다. 송지영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용인 기독교 묘원에 있는 장만영의 유택에 시비가 세워졌을 때 김광균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했다고 박태진은 전했다. 장만영의 시비를 세운 뒤 김광균은 시에 대한 열정이 새삼 솟았는지 ‘현대문학’에 신작시 5편을 발표했다. 기업가로 변신하면서 붓을 놓은 지 30여 년 만이었다. 20세기 마지막 모더니스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 뒤로도 김광균의 문학비 건립작업은 계속 이어졌다. 명동 대폿집에 드나들던 시절의 친구였던 이봉구의 문학비를 경기도 안성 그의 옛집 앞마당에 세워주었고,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높이 평가했던 김기림과 백철의 문학비도 세워주었다. 김기림은 납북된 탓에 묘소가 없었으므로 그가 한때 적을 두었던 서울 계동 중앙중·고등학교 입구에 세워졌고, 평북 의주 출신의 백철 역시 마땅한 장소가 없어 사위의 선영에 건립했다. 93년 김광균이 세상을 떠난 뒤 구상 등이 주동이 돼 그의 시비 건립을 논의했으나 그의 시비가 건립된 것은 11년이 지난 2004년이었다. 그의 시비는 서울 혜화전철역 부근에 세워졌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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