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각수만 1800명, 국난 극복 기원하며 경문 옆에 이름 남겨

경판 가운데 경문이 새겨진 바깥의 변계선에 수많은 각수(刻手·새긴 이)의 이름이 눈에 띈다. 출신 지역이나 신분을 기록한 예는 극히 적고 이름과 법명만 판각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조대장경에는 1800여 명의 각수가 참여했다. 화엄종·유가종·천태종의 승려 지식인들, 향리, 전문 각수장이 등 신분도 다양하다. 동명이인으로 보이는 각수도 보인다. 각성인(刻成人) 가운데 하나인 석광(釋光·사진)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판각 작업을 하던 13세기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본다.

5238만자 팔만대장경을 새긴 사람들

석광의 신분은 승려였다. 고종 18년(1231)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쳐들어와 방화와 살육을 자행하자 고려인들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치열한 항쟁 속에서 크고 작은 사찰에서는 몽골군이 하루 빨리 물러나기를 기원하는 법회가 수시로 열렸다. 석광도 생사의 경계선에서 번민했다. 저 무자비한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기도’ 말고 뭐가 있을까? 때마침 부처님의 힘을 빌려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판각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래! 대장경 만드는 일에 동참하는 거야.”

그는 그 길로 대장경을 판각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자타가 실력을 인정하는 각수는 물론 과거에 급제했던 진사(進士) 임대절(林大節)·영의(永義), 지방 토착세력인 호장(戶長) 배공작(裵公綽) 등과 같은 유력 인사들이 와 있었다. 그리고 천태산인(天台山人) 료원(了源), 명각(明覺), 합천 해인사의 대승(大升) 스님과 김득초(金得貂)·최동(崔同) 등 일반 백성까지 모여들었다.

석광은 판각 작업을 지휘하는 수기(守其) 대사를 가까이서 도왔다. 그 말고도 여러 스님들이 현종 때 판각한 초조대장경, 송나라 및 거란 대장경 등을 일일이 대조해 교감한 경전의 필사본을 경판에 새겼다.

석광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을 목판에 새겼다. 수선사(현재 순천 송광사)의 혜심(慧諶) 큰스님이 ‘불교인이라면 필독해야 할 경전’이라는 내용의 발문을 지어주었다. 고종 15년(1228) 4월 초 무사히 조각을 마치자 법당으로 가 일천배를 올렸다. 곧 목판을 이용해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인쇄해 배부했다.

이윽고 고종 24년(1237)에 『대반야바라밀다경』의 제61권 26장을 완성했다. 이듬해 김승(金升)·박숭보(朴崇<5B9D>), 득명(得名)·혜량(惠良)·이중(李中) 등 8명과 함께 『마하반야바라밀경』의 제25권 29장을 공동으로 조성(彫成)했다. 또한 10년 전 판각한 적이 있는 『금강반야바라밀경』 1권을 모두 조성했다.

고종 26년에는 득홍(得弘)·광림(光林) 등과 함께 『대승대집지장십륜경』 『무진의보살경』 등 4종의 경전을 조성했다. 고종 30년에는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 산하의 조성 공간을 오가며 맹활약했다.

그는 고종 24년부터 32년까지 8년간 30종의 경전 조성에 참여했다. 경판을 처음 판각하는 사람들에게 새김 요령과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다. 몽골군과 맞서 싸우다 죽은 이름 모를 고려민의 극락왕생과 몽골군이 하루 빨리 물러가기를 기원하면서 한 획 한 획 정성을 다해 새겼음은 물론이었다.

선데이 배너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