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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생 로랑의 힘

좋아하는 것끼리는 서로 당기는 힘이 있다고 한다. 지난달 방문한 파리 시립미술관 프티팔레(Petit Palais)에서 이브 생 로랑의 40년 인생을 만났다. 그곳에선 여성복 바지를 처음으로 탄생시킨 디자이너, 여성에게 자유를 입힌 ‘패션 혁명가’를 기리는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브 생 로랑이란 이름에 나는 문득 20대(代)의 대화 한 토막을 떠올렸다. 대학 졸업 후 구두디자이너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였다. 어느 날 파리 출장을 다녀온 직장 선배는 내게 이브 생 로랑의 의미를 물었다. “나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여성이 입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옷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의 포옹이다. 이런 행운을 발견하지 못한 여자들을 위해 내가 존재한다.” 아마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브 생 로랑의 메시지를 전해준 그 선배를 존경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면서 과연 그처럼 확신을 갖고 내 직업에 임할 수 있을까 몇 번이고 반문했다. 그런 추억들을 떠올리며 나는 어느새 청년 시절로 돌아간 듯 잰걸음으로 프티팔레를 향하고 있었다.

미술관 앞에는 4월의 매콤쌉쌀한 파리의 봄바람을 맞으며 뱀처럼 구불구불한 줄이 길게 서 있었다. 반나절이 지나도 사람이 줄어들 줄 몰랐지만 나는 젊은 시절의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설렘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파리에서는 관람객이 전시를 쾌적하게 볼 수 있도록 입장객 수를 제한한다, 줄을 열심히 선다 해도 전시를 본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고 항의하는 사람도 없다, 다행히 이날은 오전 일찍부터 줄을 선 터라 오후에는 입장할 수 있었다.

실내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한 편의 대(大)서사시였다. 그가 1958년 크리스티앙 디오르에 입문해 만든 첫 작품을 비롯해 총 300벌이 넘는 의상이 전시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몬드리안, 마티스, 피카소, 팝 아트의 예술세계를 색과 패턴의 배합으로 표현하려 했던 실험정신을 구현한 작품들이 감동적이었다.

건축과 회화, 패션과 음악의 각종 장르를 넘어선 예술의 협업, 이른바 ‘크로스 오버’를 한 것은 이브 생 로랑이 원조였다. 여행을 좋아한 그는 인간끼리 어우러진 다양하고 심층적인 정서, 인간 본질의 따뜻한 감성을 발견해 작품에 반영했다. 드넓은 대지, 광포한 태양의 열정 등 아프리카 미술에 내재된 원시적 영감까지 패션예술로 승화시켰다.

이브 생 로랑은 흑인 모델을 패션쇼 런웨이에 오르게 한 최초의 디자이너였다. 의식은 현재보다 늘 앞서고, 아이디어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이었다. “검은색은 나의 피난처이며, 종이 여백 위에 있는 선”이라고 할 정도로 검은색을 사랑했다. 이브 생 로랑, 여자가 아름답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마음의 우아함이라고 생각한 남자였다. ‘유행을 무조건 따르면 자신의 깊은 본성은 물론 자신만의 스타일과 자연적인 우아함을 잃게 된다’고도 조언했다. 그는 자유주의자였다. 사회를 바꾸기 위한 어떤 행동도 주저하지 않았던 실천가였다. 패션은 단지 여성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확신과 신뢰감을 부여하고 자기를 찾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패션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여성들에게 힘을 주었다.

그는 투사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고독”이라 답했다. 그러면서 “길을 잃고 싶지 않다”고 했다. 동성애자 의혹에 시달렸든, 인격의 조급함으로 폭력적이었든 그가 실험하고 시도했던 열정은 우리들 가슴을 뛰게 만든다. 시대 변화를 꿰뚫어본 거장의 회고전을 보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감동이 차오르는 것은 본질을 표현하려는 그들의 지난한 몸부림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가에게서 신의 모습을 구하지 않는다. 이브 생 로랑은 예술을 위해 존재했던 인간일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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