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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家 를 찾아서] 천안 목천읍 동리 이동녕家

지난 2월 천안 목천읍 동리 석오 이동녕 선생 생가 앞에 ‘이동녕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선생의 손자 이석희 전 대우그룹부회장(왼쪽)과 증손자 이용순씨가 기념관을 둘러보며 담소하고 있다. 가운데에 이동녕 선생의 실물크기 밀납인형이 보인다.
명문가란 통상 한 집안에서 정치인·관료·학자·기업인 등이 다수 배출된 경우를 말한다. 천안·아산에서 명문가로 일컬을 만한 집안을 소개한다.



대동단결 앞세운 임정의 버팀목 … “모두 그 분 말 존중했죠”

글= 조한필 기자, 사진= 조영회 기자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김구는 저서 『백범일지』에서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1869~1940)의 인물됨을 이렇게 평했다.



석오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臨政) 출범의 산파역이자, 임정의 굴곡을 지켜보며 지켜온 산증인이였다. 지금의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 의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통령대리 및 주석(네 번)을 지냈다.



임정뿐 아니라 석오(이동녕의 호)는 우리나라 근대사에 출현하는 주요 단체와 사건의 중심인물이었다. 그의 손자 이석희(78)씨는 “할아버님의 생애 자체가 한국 근현대사였다”면서 “19세기 말 애국계몽시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는 근현대사에서 석오를 빼고는 말이 안 될 정도”라고 말했다. 독립협회(1896)→서전서숙(1906)→신민회·오산학교(1907)→경학사·신흥무관학교(1910)→임정(1919).



말끔히 정비된 천안 목천읍 동리의 이동녕 생가.
석오는 천안 목천읍 동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 예닐곱살 때 사서삼경을 떼는 등 신동으로 통했다. 부친이 지방수령으로 의성·영해군수를 지냈다. 23세 때인 1892년 국가시험인 진사시험에 합격, 부친과 같은 관리의 길로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뒤바뀌었다. 우리나라는 동학농민혁명과 함께 청일전쟁으로 국토가 전쟁에 휩싸이게 됐다. 곧이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겪고,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지내는 치욕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청년 이동녕의 인생에 큰 전환기를 맞게 된 것이다. 1896년(27세) 여름 독립협회에 가담한다. 과거시험을 통해 전제왕국의 관리로 입신양명하려던 그가 민권독립운동의 기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석오는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는 이종일과 가깝게 지냈다. 이씨는 회고록에 “석오가 작금의 내외정세로 보건대 지금은 매우 격분하고 개혁하는 시대입니다 … 우리는 구질서를 깨고 신질서를 맞이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쓰고 있다.



이동녕 연구에 전념해 온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가 강대국들의 이권쟁탈의 장이 되면서 석오는 국가의 주요 동맥이 절단당하는 크나큰 아픔을 겪게 됐다”며 “이 시기 민권운동과 이권수호운동에 전심전력할 것을 스스로 다짐했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분석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이동녕과 그 시대』2002년)



‘왕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 선포



지난 2월 석오의 고향 목천에 이동녕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기념관 입구에 세워진 흉상을 본 손자 이석희씨가 “석오가 임시의정원 의장이던 50세 시절의 모습”이라며 “같은 흉상이 1996년 국회의사장 로비에 세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석오가 중심이 돼 현재 국호인 대한민국을 결정했다”며 “이는 우리나라가 비록 일제강점기였지만 임금의 나라 ‘제국(帝國)’에서 국민의 나라 ‘민국(民國)’을 선포한 위대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임정은 출범 직후 요동쳤다. 특히 상층부가 흔들렸다. 내각책임제 하의 정부 수반인 이승만 국무총리가 미국에서 임정이 있는 상하이(上海)에 부임하질 않았다. 석오가 국무총리로 취임, 임정을 실질적으로 운영해야만 했다.



국내에 있던 다른 임시정부를 통합한 상해 임정은 정치체제가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제로 전환됐다.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등의 갈등으로 내무총장인 석오가 국정을 주관했다. 이동휘가 소련 레닌이 준 자금 유출 문제로 사임하자 그 업무를 대리 수행했다.



임정이 1921년부터 창조파·개조파로 갈려 큰 시련을 겪는 시기, 석오는 내무총장으로서 대동단결을 주장했다. 1922년엔 평생의 친구 이시영 및 조소앙·노백린 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 흔들리는 임정을 유지시키려 노력했다.



1924년 9월 이승만의 장기 궐석으로 대통령 임무를 수행하며, 박은식이 제2대 임정 대통령에 당선되는 걸 돕는다. 1926년엔 김구가 국무령으로 견고한 내각을 구성하도록 심혈을 기울여 후원한다.



국무위원 집단지도체제 아래서도 국무위원장(주석)으로 ‘후배’들 활동을 돕는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 때는 김구 뒤에서 지원했다. 윤의사 의거 성공 후 임정 요인들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상하이를 떠나 유랑 길에 오른다.



쓰촨성 단칸방서 맞은 이동녕의 최후



윤봉길 폭탄의거가 있었던 1932년, 상하이에서 가흥으로 피신한 김구·이동녕·엄항섭.(왼쪽부터)
1940년 3월 13일 오후 4시 40분 쓰촨성 기강현의 임정 사무실 2층 단칸방. 김구 등은 중국과 접촉을 위해 중경에 머무를 때 였다. 석오는 열흘 전 김의한(임정 고문이었던 김가진의 아들)내외 등 임정 식구들과 야산에서 나물을 캐는 등 화창한 초봄 나들이를 했다. 그런데 석오는 그날 이후 지병인 천식이 재발,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부인과 자녀 등 직계가족은 모두 고국에 있어 임종하지 못했다.



김의한의 부인 정정화씨의 회고. “ 내가 꼭 아버님처럼 여겼던 분이었고, 상하이에서부터 줄곧 20여 년을 모셨던 분이다 … 국수를 함께 사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이셨으나 대수롭지 않게만 여겼다 … 그날 밤 심하게 앓으신 후 곡기를 끊은 지 열흘 만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중국 현지에 묻혔던 석오의 유해는 해방이 된 후인 1948년 김구의 주선으로 고국에 돌아와, 사회장 봉환식과 함께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애국계몽·독립운동으로 점철된 인생



이동녕의 친필 ‘산류천석’(山溜穿石,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듯 조국해방도 언젠가 꼭 이뤄질 것이라는 뜻)’.
석오의 생애 71년은 말그대로 파란만장했다. 16세 때인 1885년 이동녕 가족은 고향 천안 목천에서 서울로 이주한다. 김옥균 등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무위로 돌아간 다음 해였다. 종로구 봉익동 11번지. 손자 이석희씨는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들 본적은 지금도 모두 이곳”이라며 “할아버지가 다니셨던 상동교회도 이곳에서 멀지 않다”고 말했다.



석오는 만민공동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바람에 이승만·이준 등과 함께 투옥된다. 1898년(29세) 7개월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나와 ‘국제신문’에서 무기명 사설을 싣는다. 몇년 후 이상재·전덕기 등을 만나 YMCA기독운동에 참여하고 상동교회에서 청년회를 조직, 항일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 때 신채호·이회영·김구를 만난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첫 중국망명 길에 오른다. 북간도 용정에서 우리나라 최초 항일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 중국동포 2세 교육에 나선다.



일시 귀국한 그는 안창호·이동휘·양기탁 등과 신민회를 만들고, 총서기로 실질적 운영을 맡는다. 신민회가 대성학교·오산학교를 세우는데도 공헌한다. 한일합방 후 2차 중국 망명. 서간도 요녕성 유하현 삼원보에서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후일 서로군정서로 바뀜)를 이회영·이시영 형제와 설립한다. 곧이어 독립쟁취를 위한 무관 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초대 소장에 취임한다. 이 학교는 후일 임정 무장독립단체인 광복군의 초석이 된다.



1913년 경 블라디보스톡에서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에 귀의하고 포교 활동에 전념한다. 러시아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 운영하고, 대동신문·해조신문을 발행했다. 1919년 1월 길림성에서 대종교 교주 김교헌 및 조소앙·조완구 등과 함께 국내 3·1운동에 앞서 대한독립선언서를 내외 선포한다. 이 선언서엔 이승만·안창호·신규식 등이 참여했다. 이후 험난한 그의 임정활동이 이어졌다.



■이동녕의 가족



석오가 속한 연안 이씨 시조는 이무. 삼국통일기 소정방과 함께 온 당나라 장수였다. 그가 소정방의 신라 병합 야욕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연안 이씨는 조선시대 삼정승과 대제학을 8명씩 배출한 명문가. 현재 4개파가 있는데 석오는 태자참사공파에 속한다. 숙종 때 이조판서 이만성과 예조판서를 지낸 이지억 부자의 직계자손이다. 석오(石吾)란 호는 진사시험에 합격한 23세 때 ‘나를 돌로 생각한다’는 겸손함의 의미로 지었다.



1894년(25세) 결혼해 이듬해 첫아들 이의직이 출생했다. 이의직은 석오가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부임하던 중인 1915년 사망한다. 이에 앞서 부인과 둘째 아들 이의식(1900~?) 등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우리 우리 배달 나라에/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좔좔 물결치며 돈다.” 신흥무관학교 교가의 후렴구다. 석오가 작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함께 지은 것으로 생각되는 애국가 가사가 현 애국가와 비슷해 주목된다. “화려강산 동(東)반도는 우리의 본국이요/ 품질 좋은 단군자손 우리 민족일세/(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우리나라 우리들이 길이 보전하세.”



이의식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1회로 졸업하고 의학박사가 돼 서울에서 개원했다. 해방 후 미군정 민주의원에 뽑혔으며 반민특위 감찰관을 역임했다. 6·25 때 납북된다. 그는 이철희(1925~1976)와 이석희(1932~ ) 등 두 아들을 뒀다. 철희씨는 미 샌프란시스코대학을 졸업하고 해방 후 귀국한다. 경무대 대통령비서관, 문교부 편수국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 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석희씨는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대우개발 사장, 대우그룹 부회장, 대우증권 회장, 대우통신 회장(1995년)을 역임하고 은퇴했다. 현재 광복회 부회장, 이동녕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있다.



석오의 증손자인 용순(50)씨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 국제부 차장을 지냈다. 용석(46)씨는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사업 활동 중.



■이동녕에 대한 평가



석오 이동녕에 대한 당시 주위 평가는 한결같다. ‘선생의 애호(사랑)를 최후까지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김구가 평했듯 석오는 자신의 공은 숨기고 남을 칭송하는 경양의 미덕을 지닌 위인이었다.



“임정에서는 일을 늘 그분이 중심이 되어 꾸몄어요. 백범(김구)도 그분 앞에 가면 그분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윤기섭·조완구·이시영도 이동녕 그분의 의사를 존중했습니다.”(아나키스트 정화암의 회고)



“임종을 제가 했는데 워낙 공정하고 사심이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 동갑내기인 성재(이시영)와는 늘 행동을 똑같이 했고 일곱살 아래인 백범이 선생님 대우를 깍듯이 존경했던 분이 석오이었습니다. 무슨 큰 일이 있을 때면 백범이 꼭 선생을 찾아와 상의했고, 그럴 때면 ‘백범, 백범’ 하면서 같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머리를 맞대고 말씀하셨다.”(김의환의 부인 정정화 회고)



정정화는 석오 말년 가족들을 대신해 그를 모셨다. 석오는 “숨을 거둘 때까지도 깨끗하고 꼿꼿한 자태를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깔끔한 용모답게 공사(公私)에 있어 너저분한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임정 산하 세 정당이 통합할 것을 유언으로 당부했다. 석오 사후 2개월 뒤 한국국민당(위원장 이동녕), 한국독립당(위원장 조소앙), 조선혁명당(위원장 홍진)이 통합돼 그의 유언은 이뤄진 셈이다.



■이동녕이 지은 ‘남녀학생에게’



석오 이동녕이 임정 내무총장으로 있던 1919년 10월, 그의 명의로 본토수복을 염원하는 포고문을 선포한다. 제1호가 고국의 청년에게 보는 글 ‘남녀학생에게’. 그가 자취하던 상하이 프랑스조계 보창로 단칸방에서 초안을 작성한 후 김구·조완구 등과 의논해 수정했다. 3·1운동의 주역인 학생들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글 속에 배어있다. 또 애국심을 호소하는 그 절절함에 가슴 속까지 서늘하다.



“ 내무총장 이동녕은 친애하는 우리 남녀학생에게 고한다. 포악한 적의 수중에 있으면서 자유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제자(諸子, 모든 이)의 고결한 정신에 대해 찬탄을 금할 수 없다 … 애국적 열정이 우리 2천만 동포의 흉중에 가장 비장한 자각과 결심을 일으키기에 족하기 때문에 … 아(我)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합병의 대죄악을 광정(바로 잡음)하는 외에는 여하한 개혁이나 선정도 요구하지 않는다 … 오호라! 동포여. 조국의 위기를 구원함은 지금이다. 제자의 분기할 때가 또다시 도래하였다. 주저함을 허(許)하지 않는 위기가 목전에 팝박하였다 … 삼천리 강산에 무수한 태극국기를 게양하자!… 제자를 무참하게도 적중으로 내모는 것을 생각할 때 오인(나)의 흉중은 실로 칼로 찌르는 것 같은 감이 있다 … 조국을 사랑하는 정신은 제자와 나 사이에 무형적인 위대한 결합을 이루었음을 확신한다 … 청년 남녀 제자여. 노력하라. 국가는 의뢰한다.”



마지막 문구 ‘국가는 의뢰한다’에서 비장함이 느껴진다.



시리즈를 마치며



‘중앙일보 천안·아산’이 지난해 발행 첫호부터 시작한 시리즈 ‘명문가를 찾아서’를 마칩니다. 오늘자까지 14회를 실었습니다. 애독자께 감사드립니다.



1. 아산 둔포면 신항리 윤보선



시대를 앞서간 ‘글로벌 집안’(2009년 3월 17일)



2. 천안 병천면 용두리 조병옥



항거로 점철된 한양 조씨 3대 (2009년 5월 26일)



3. 아산 배방읍 중리 맹사성



절의와 청렴의 표상, 맹씨행단…3정승 시조소리 들리고(2009년 6월 26일)



4. 천안 병천면 가전리 김시민



이무기 잡던 어린 장수가 ‘진주대첩’영웅으로(2009년 8월 7일)



5. 아산 염치읍 대동리 홍가신



“검은 옷을 입은 저 아이가 누구인고”(2009년 8월 21일)



6. 천안 직산읍 마정리 황세득



목숨 던진 충혼의 기개, 아들이 ‘대잇기’(2009년 9월 1일)



7. 아산 송악면 외암리 이 간



성리학 3대논쟁 이끈 노론의 정수(2009년 9월 22일)



8. 천안 수신면 장산리 홍대용



실용 과학에 일찍 눈뜬 북학파 ‘맏형’(2009년 10월 9일)



9. 아산 인주면 공세리 덕수 이씨



어머니·아내·아들·손자, 모두 항일투쟁전선에 (2009년 11월 17일)



10.천안 북면 은지리 박문수



“암행어사 출두요~”탐관오리 무릎 꿇린 감찰관의 표상 (2009년 12월 29일)



11.천안 수신면 속창리 한명회



세조 등극시킨 희대의 책사…35년간 권력 정점에 서다(2010년 1월 29일)



12.아산 송악면 동화리 진주 강씨



3,4대씩 연이어 과거 급제한 ‘수재 집안’… 효행은 가문의 전통 (2010년 2월 16일)



13.천안 풍세면 삼태리 천안 전씨



온조와 왕건 도와 백제·고려 건국의 초석으로 (2010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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