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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서 두부사업 성공한 리스쩡, 중국 혁명의 자금줄

1930년대 초 상하이에서 세계문화합작회의를 준비하던 리스쩡(왼쪽 첫째)과 장징장(오른쪽 셋째), 차이위안페이(가운데), 우즈후이(왼쪽 셋째).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국민당의 4대 원로(元老)라고 불렀다. 김명호 제공
1907년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리스쩡(李石曾)은 콩(豆)에 관한 연구서적을 프랑스어로 출간해 중국 두부를 서방세계에 최초로 소개했다. 반응이 나쁘지 않자 파리 교외에 두부공장을 세우고 몽파르나스에 중국음식점 중화반점(中華飯店)을 열었다. 신문에 “아무 맛도 느낄 수 없는 두부의 진미를 선보이겠다”는 광고를 연일 내보냈다.

리스쩡은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군기대신(軍機大臣)을 역임한 제사(帝師) 이홍조(李鴻藻)의 막내아들이었다. 19세 때인 1900년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유린하고 황실 정원 원명원(圓明園)을 폐허로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년 리스쩡은 “서태후가 황제를 데리고 시안(西安)으로 내빼자 원숭이처럼 생긴 서양인들은 모든 화풀이를 선량한 중국 백성들에게 해댔다. 대로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중국인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평소에 온갖 잘난 척하며 거드름 피우던 고관이란 것들은 묘한 재주가 있었다. 어느 구석에 숨었는지 하루아침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며 유학을 결심했다. 무능한 정부와 집안 배경이나 믿고 나댈 때가 아니었다.

리스쩡은 양무파(洋務派)의 영수 이홍장(李鴻章)을 찾아갔다. 보수파의 우두머리급에 속했던 아버지와는 의논을 해봤자 신통한 해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이홍장은 사사건건 자신을 걸고 넘어지던 사람의 막내아들에게 해외에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일러줬다. 리스쩡은 부친의 정적과 머리를 맞대고 미래를 의논했던 현량사(賢良寺)의 밤을 평생 잊지 못했다.

리스쩡은 이홍장이 가르쳐 준 대로 했다. 난쉰(南尋) 거부의 아들 장징장(張靜江)과 짜고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다는 쑨바오치(孫寶琦)를 매수할 계획을 세웠다. 쑨은 구워 삶기가 쉬웠다. 이홍장의 말대로 생긴 거 하나는 멀쩡했지만 천성이 너절하고 돈을 좋아했다. 젊디 젊은 리와 장을 대견한 듯이 바라봤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프랑스에 도착하면 공무를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공사관에 출근할 필요도 없다. 하고 싶은 걸 맘대로 해라”며 싱글벙글했다. 무슨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1년 후 두 사람은 쑨의 수행원 자격으로 중국을 떠났다. 외교사절이 아니면 출국이 불가능할 때였다.

서구인들은 아침마다 우유를 마셨다. 리스쩡은 고향에서 마시던 두유가 그리웠다. 치즈 덩어리를 볼 때마다 두부가 생각났다. 생긴 것들은 비슷했지만 어릴 때부터 소식(素食)을 해온 리는 우유와 치즈가 영 비위에 맞지 않았다. 외국어에 능했던 동향(同鄕) 후배 치루산(齊如山)에게 “우리 고향 농민들을 모집해 프랑스까지 인솔해라”는 편지를 보냈다. 중국 농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두부 기술자였다. 치는 두 차례에 걸쳐 허베이(河北)성 가오양(高陽)현 농민 40명을 이끌고 프랑스로 향했다. 리스쩡은 프랑스 여인 70여 명도 고용했다. 프랑스인들의 구미를 감안해 두부 코코아두부 커피를 출시했다. 두부로 만든 각종 간식과 캔으로 된 제품도 시장에 내놨다. 물건 대기가 바쁠 정도였다. 중화반점에는 두부요리를 먹으려는 프랑스인들로 항상 바글바글 했다.

리스쩡은 사업에 성공하자 본인도 잘 몰랐던 기질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친이 고관으로 있는 청(淸)왕조의 전복을 위해 쑨원에게 거액의 혁명자금을 지원하고 야학을 개설했다. 농민들은 모국어와 프랑스어를 비롯해 서구의 과학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이어서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우즈후이(吳稚暉)와 함께 근공검학(勤工儉學)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부터 20년까지 10년간 17차에 걸쳐 2000여 명의 가난한 중국 청년들이 프랑스에 건너와 일하며 공부했다.

근공검학은 리스쩡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를 초래했다. 리펑의 부친 리시환, 저우언라이, 차이허썬(蔡和森), 덩샤오핑, 천이(陳毅), 리푸춘(李富春), 샹징위(向警予), 차이창(蔡<7545>), 녜룽전(<8076>榮臻) 등 당대의 전설적인 혁명가들을 배출했다. 그 모든 원인은 혁명과 전혀 상관 없는 두부였다.

두부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한고조 유방의 손자였던 유안이었다. 수천 년간 중국인들에게 가장 정감 어린 식품이다. 분쟁의 소지를 제공한 적이 없었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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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