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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가정의례준칙’에 벌칙 추가 … 끝내 약발 못 받고 흐지부지

1973년 한층 강화된 가정의례준칙이 발표된 후 시민들이 실천 촉구 가두캠페인을 벌이는 모습. [중앙포토]
1973년 5월 17일 ‘가정의례준칙’과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이 발표되었다. 1969년 3월 5일 제정된 ‘가정의례준칙’을 개정한 것이다. 4개장 71개조로 된 69년의 가정의례준칙이 혼례·상례·제례를 간소화하는 방안만을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면, 73년의 개정안은 전체 조항을 24조로 단순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처벌 조항을 담고 있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처벌 조항이다. 청첩장·부고장을 돌리거나 장식물의 진열 및 사용, 답례품의 증여, 굴건·만장 사용, 주류 및 음식물 접대 등의 행위에 대해 5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했다.



가정의례준칙은 복잡한 의식을 간소화함으로써 서민 부담을 줄이고 의식을 사회 변화에 적합한 형태로 바꾸고자 한 것이었다. 실제 60년대 이후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인해 전통적인 의례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가정의례준칙으로 상례와 제례는 특수한 예를 제외하고는 과거에 비해 그 절차가 상당히 간소화되었고, 3일장과 같이 상례로 일상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정의례준칙은 쉽게 정착되지 않았다. 73년의 처벌 조항 제정의 명분은 소위 ‘사회지도층’의 허례허식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73년 이후 매년 강력한 단속 의지를 천명했고, 위반자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명단 발표만으로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사회지도층’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유신체제 기간을 통해서 ‘사회지도층 정화’라는 말이 지겹게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정의례준칙이 그다지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수백 년간 계속돼온 관습을 정부의 강제적 정책으로 간소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정부의 강권적 추진은 마치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정책을 재생해 놓은 것 같았다. 총독부는 몇 차례에 걸쳐 의례 개정을 추진했고, 12년과 34년의 상례와 혼례 절차 개정 시도는 그 대표적인 예였다. 굴건 대신 검은 양복에 완장을 차고 치르는 5일장 방식이 이때 시작되었다.



많은 논란 끝에 가정의례준칙은 97년 ‘건전 가정의례의 정착 및 지원에 관한 법률’과 ‘건전 가정의례준칙’으로 대체됐다. 절대적 힘을 갖고 있던 국가의 관습에 대한 강제가 더 이상 효율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한 허례허식의 확산은 서민들로 하여금 더 심각한 소외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80년대 이후 이혼 사유의 상당수가 혼수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 나아가 부조가 뇌물의 통로로까지 변질되면서 ‘건전’ 가정의례준칙을 비웃게 되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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