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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 뉴스 <97> 로스차일드 가문

3월 유대계 금융 재벌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금기가 깨졌습니다. 로스차일드 성을 쓰는 남성만 오를 수 있었던 은행 최고경영자 자리에 처음으로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이 임명된 거죠. 주인공은 바로 니겔 히긴스(49). 로스차일드 가문은 바로 이 고리타분한 원칙으로, 지난 200년 동안 세계 금융을 좌지우지하는 황금 권력으로 군림해 왔습니다. 영국 귀족인 모세 몬피티리오란 외척이 로스차일드로 성을 바꿔 경영에 참여했을 정도였습니다. 오늘은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죠.

김경진 기자

유대인 마이어, 제후국의 재정 대리인 돼 가문 일으켜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가문을 일으킨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1744년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게토(격리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성이 없었습니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집 대문에 그려진 ‘붉은(rot) 방패(schild)’에서 따온 것이죠. 아버지를 일찍 여읜 11살의 소년은 하노버의 한 은행에서 사환으로 일하게 됩니다. 소년은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5년 뒤 고향으로 돌아와 골동품 가게를 시작합니다. 그러다 주화 수집광인 당시 수석 재정관 부데루스를 통해 헤센의 제후인 빌헬름 공과 친분을 쌓게 됩니다. 진귀한 주화를 빌헬름 공에게 갖다 바치며 공을 들인 결과, 그는 1769년 어용 상인으로 지정됩니다. 그는 특유의 인내심으로 때를 기다립니다. 친영국 성향의 빌헬름 공이 나폴레옹 군대에 쫓겨 망명을 떠나자 목숨을 걸고 그의 대외 차관 장부를 지켜냅니다. 자신의 재산을 다 뺏기면서까지 말이죠. 대가는 컸습니다. 돌아온 빌헬름 공은 그에게 유럽 각국에서 돈을 수금할 수 있는 권리를 줍니다. 두둑한 커미션과 함께 말이죠. 가난한 유대인 골동품상이 왕실 재정 대리인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다섯 아들에게 자신을 대리해 유럽 각국에서 수금하는 일을 맡깁니다. 덕분에 그의 아들들은 유럽의 지리와 정보를 훤히 꿰뚫게 됐습니다. 이 일은 머지않아 로스차일드 가문이 다국적 금융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됩니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유럽에 포진한 다섯 아들, 정보 교환하며 돈줄 쥐어

마이어의 가장 큰 무기는 그의 아들들이었습니다. 마이어는 1798년 당시 21세였던 셋째 네이선을 영국으로 보냅니다. 네이선의 진두지휘 아래 워털루 전투에서 엄청난 자본을 증식시킨 형제는 유럽 주요 도시에 은행을 하나씩 세워 나갑니다. 첫째인 암셀은 프랑크프루트, 둘째인 살로몬은 빈, 셋째 네이선은 런던, 넷째 칼은 나폴리, 다섯째 제임스는 파리에 은행을 세웁니다. 역사상 최초의 다국적 금융 기업이 탄생한 거죠.

가문의 사신들은 이 다섯 은행을 오가며 정부와 금융계의 동향을 다른 국가의 은행에 30시간 정도 먼저 알렸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먼저 안 형제들은 각국에서 공매도를 합니다. 주식 가격이 떨어질 것을 미리 알고 주식이 없는 상태에서 주식을 판 다음 가격이 떨어진 이후 싼 주식을 사서 메우는 투자 방식이죠. 이런 식으로 다섯 형제는 한 몸처럼 움직였고 그 결과 유럽의 돈줄을 움켜쥘 수 있었습니다.

형제 중 하나가 손해를 봐도 다른 형제가 이를 만회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철도 사업에서 재미를 못 보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철도 건설을 추진하는 식이었지요. 프랑스에서 민간은행 때문에 손해를 봤을 땐 오스트리아에 그와 똑같은 민간 은행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가문의 문장에는 5개의 화살이 리본에 묶여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다섯 개의 화살이 바로 이들 5형제를 뜻합니다. 화살처럼 빠르되, 하나로 묶여 있어 어느 누구도 부러뜨릴 수 없는 강한 힘을 지닌 형제 말이죠.

횡령금으로 밀수…잘못된 정보 흘려 수익 올리기도

로스차일드 가문 휘장
형제 중 가장 두뇌가 비상했던 사람은 셋째인 네이선이었습니다. 그는 겨우 2만 파운드를 들고 영국으로 건너가 의류 수출 사업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1806년 나폴레옹이 영국에 대륙 봉쇄령을 내리자 유럽의 공산품 가격은 폭등했습니다. 싸고 품질 좋은 영국산 제품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때 네이선은 빌헬름 공의 투자자금을 횡령해 밀수 사업에 뛰어들어 돈방석에 앉게 됩니다. 네이선은 이 돈의 절반을 황금에 투자했고 전쟁으로 황금 값이 치솟자 정부에 비싼 값에 팔아 넘기며 차익을 남깁니다. 여기에 적진을 뚫고 황금을 영국군에게 전달하고 수수료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죠.

이후 네이선은 영국 로스차일드 은행을 세우고 본격적인 금융 사업에 뛰어듭니다. 그러던 1815년 6월 18일 토요일. 가문의 운명을 바꿔놓은 사건이 터집니다. 이날은 벨기에 남동부의 워털루 전쟁에서 영국군이 승리한 날입니다. 이 소식을 영국에서 가장 빨리 접한 사람은 네이선이었습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영국 국채를 모두 내다 팝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영국이 전쟁에서 패한 것으로 생각해 정신없이 영국 국채를 팔아치웁니다. 국채 가격이 55% 이하로 떨어지자 네이선은 유유히 국채를 다시 사들입니다. 이날 100파운드에 달하던 영국 국채는 한때 5파운드까지 떨어졌습니다. 네이선이 헐값에 영국 국채를 사들인 후에야 영국군의 승전보가 울렸습니다. 그는 폭등하는 영국 국채를 되팔아 엄청난 차익을 남기게 됩니다. 막내인 제임스 역시 프랑스에서 같은 방식으로 돈을 법니다. 워털루 전투 후 형제의 재산은 2억3000만 파운드로 불어나게 됩니다.

편지 조작하면서까지 전쟁 막아 재산 지켜

네이선은 훗날 이렇게 회상합니다. “거리가 피로 물들 때마다 나는 사들였다.” 가문의 재산이 증식된 순간이 모두 전쟁과 연관돼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폴레옹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로스차일드 가문도 없었을 겁니다. 오죽하면 다섯 아들의 어머니인 구틀은 “내 아들이 전쟁을 원치 않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까요. 아들들이 돈줄을 막아버리면 전쟁을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얘기죠.

그러나 부가 어느 정도 쌓이면 이를 지키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지요. 로스차일드 가문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국채의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서라도 평화를 원했습니다. 7월혁명 이후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재상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며 전쟁 기운이 감돌자 다섯째인 제임스는 조작된 편지를 보내 둘을 화해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부와 외교력을 바탕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국가의 굵직굵직한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자본을 증식해 나갑니다. 네이선의 아들인 라이오넬은 1875년 어마어마한 거래를 아무렇지 않게 성사시킵니다. 수에즈 운하의 주식 지분을 가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판다는 소식을 들은 라이오넬은 디즈레일리 영국 총리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총리는 라이오넬에게 400만 파운드를 빌려 주식을 사들입니다. 이 거래를 통해 라이오넬은 10만 파운드의 수수료를 챙기게 됩니다. 동시에 영국 정부에 막대한 이익을 선사합니다. 1935년 이 주식의 가치는 9500만 파운드로 늘어납니다. 그와 비례해 로스차일드 은행의 명성도 나날이 높아진 건 당연하겠죠.

1885년 영국서 상원의원에 임명, 첫 유대인 세습귀족

3대가 되자 가문의 후손들은 부와 함께 명예도 누렸습니다. 1885년 라이오넬의 장남 너대니얼(내티)은 영국 여왕으로부터 상원의원에 임명됐습니다. 이로써 역사상 첫 유대인 세습 귀족이 탄생합니다. (내티는 신중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1911년 타이타닉호가 건조될 당시 금융계는 ‘영원히 가라앉지 않을 것 같은 배’인 타이타닉의 보험 사업에 진출하려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타이타닉이 가라앉자 보험회사들은 줄줄이 도산했습니다. 로스차일드 은행만 무사했습니다. 내티가 보험 사업에 아예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내티에게 비결을 묻자 당시 내티는 “그렇게 큰 배가 도저히 뜰 것 같지 않았다”고 시큰둥하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사실 내티는 타이타닉이 건조될 때 이미 뛰어난 정보력으로 위험성을 간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임스로부터 이어지는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의 명성도 대단했습니다. 1871년 ‘베르사유 강화조약’을 체결할 당시 프랑스의 알퐁스는 전쟁배상금을 낮추는 협상을 돕고, 50억 프랑을 프랑스 정부에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18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 최대의 미술품 수집가가 됩니다. 라이오넬은 렘브란트 등 17세기 네덜란드 유화 수집광이었습니다. 제임스의 막내 아들인 에드먼드는 판화 수집에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현재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는 에드먼드가 기증한 판화를 전시한 ‘에드먼드 로스차일드 홀’이 있습니다. 에드먼드는 기부의 스케일도 달랐습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이 거주할 수 있는 땅을 사 유대인을 이주시켜 이스라엘을 세우는 데 기여했습니다. 내티의 손자인 빅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터에서 폭탄 해체 전문가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 능력을 인정받아 처칠 총리의 신변 보호 임무를 맡기도 했지요.

20세기 들어 위축…82년 투자은행 세워 재도약

하지만 철옹성 같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와 명성도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1863년, 나폴리 은행이 시칠리아 황실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 데 이어 후계자가 없던 프랑크푸르트 은행도 1901년 문을 닫습니다. 빈 은행은 1938년 나치에 몰수됐습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많은 재산을 잃습니다. 전후엔 정부의 과세 공격에 시달렸습니다. 특히 로스차일드 은행의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은행은 1981년 사회당이 집권하면서 국유화됐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겐 200년을 이어온 번영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가문의 문장에 새겨진 ‘콩코디아(협력)’였습니다.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가문은 오를레앙을 설립했고 영국 일가와 지분 관계를 맺은 뒤 전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일가는 1982년 40년 전 미국 뉴욕에 세웠던 뉴코트 증권을 확장해 로스차일드 투자은행을 설립합니다. 하지만 너무 늦게 진출해서일까요. 금융 재벌로서 로스차일드의 명성은 시들해집니다. 하지만 은행 사업은 이들 가문의 거대한 부의 일부일 뿐이었습니다.

다이아몬드, 와인, 생물 이름까지 뻗어간 ‘명성’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향력은 우리가 잘 모르는 영역까지 뻗어있습니다. 프랑스 로스차일드 은행은 1956년 PLM이라는 최고급 호텔 체인을 설립합니다. 1967년에는 북방 회사를 설립해 광산업에 뛰어듭니다. 프랑스·영국 로스차일드가는 장기적으로 광산업에 투자해 왔습니다. 이 때문에 2005년 광산물 가격이 폭등했을 때 엄청난 이익을 챙깁니다. 로스차일드가가 폭등을 주도했다는 음모론이 나오기도 했지요. 로스차일드 가문은 현재 리오틴토를 포함한 세계 3대 광산업체와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는 남아프리카 드 비어스 그룹의 지분도 갖고 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내티의 장남인 월터는 생물학자였습니다. 그 덕분에 지구상에는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을 가진 생물이 200종이 넘습니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 중 세계 최상품을 자랑하는 라피트와 무통이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 소유의 와이너리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이 와인의 라벨에선 지금도 가문의 표식인 다섯 개의 화살을 발견하실 수 있답니다. 그럼에도 로스차일드가의 재산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 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전 세계 1년 총생산(GDP)과 맞먹는다는 소문도 있고, 석유 부호 록펠러 가문을 능가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상장을 하지 않고 오직 직계 가족을 통해서만 재산과 정보가 이동하기 때문에 모든 게 추정일 뿐입니다. 니겔 히긴스 신임 CEO의 등장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베일이 벗겨질 수 있을지에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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