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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나라 잃은 설움 온몸으로 받아낸 덕혜 옹주 타계

1931년 결혼 직후의 덕혜(德惠) 옹주(1912~1989)와 소 다케유키(宗武志·1908~1985). 그해 5월 8일자 조선일보는 옹주 곁 다케유키를 검게 칠해 지워버린 사진을 게재해 식민통치의 모순을 가리기 위한 정략결혼에 냉소(冷笑)를 보냈다.
나라를 앗긴 지 두 해가 지난 1912년. 고종 황제는 환갑의 나이에 고명딸을 보는 농와지경(弄瓦之慶)을 맛보았다. 덕혜 옹주를 위해 궐내에 유치원을 만들 만큼 황제는 망외(望外)의 기쁨을 안겨 준 딸을 극진하게 사랑했다. 그해 배다른 오빠 이은(李垠)이 일제의 ‘일선융화(日鮮融和)’ 정책에 의해 일본 황족 이방자와 약혼하는 일이 벌어지자, 황제는 옹주가 물 설고 낯선 일본으로 시집가는 비극을 미연에 막아보고자 했다. 시종 김황진의 조카를 금지옥엽의 배필로 삼으려 했던 황제는 1919년 1월 일제에 의해 독살당하고 말았다.



아비 잃은 딸의 운명은 옹주라 해도 순탄하지 못했다. 일본인들이 다니던 히노데 소학교를 나온 열세 살 어린 옹주는 1925년 3월 유학을 핑계로 등을 떠밀려 일본으로 건너갔다. “황후 폐하가 이왕가(李王家)의 여성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 도쿄 체류 중인 사이토 총독을 어전에 불러 특별히 말씀했으며, 이왕가 역시 오랫동안 바라던 바였으므로 서슴없이 이 결정에 따랐다(곤도 시로스케, 『이왕궁 비사』, 1926).” 그때 순종 황제의 일본인 시종 곤도는 거짓을 적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는 일제의 진의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꼬집는다. “명목상으로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하기 때문’이었지만, 사실 일본 정부가 노린 것은 옹주를 일본 황족에게 시집 보내려는 것이었다. 이때 이(李)왕실은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했다.”



가쿠슈인(學習院)대학에 들어간 옹주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1930년 친모 복녕당 양씨가 세상을 뜨자 정신분열 증세까지 보일 만큼 이역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듬해 5월 병마에서 채 회복되지 못한 옹주를 대마도 도주의 후예 소 다케유키와 억지로 결혼시켰다. 그때 또 다른 정략결혼의 희생자 이방자는 옹주를 지켜주지 못한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옹주는 한국에서 살다 한국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행복했을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일본에 끌려와 억지로 살다가 강제로 결혼했으니 이는 인간의 도리가 아니었다. 결혼식을 올리는 그 순간에도 나는 옹주가 완쾌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나는 일본 사람이었으므로 한국인에 대한 죄책감을 자꾸 쌓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가장 죄스럽게 느끼는 것이 이 덕혜 옹주의 무모한 결혼에 대해서이다(『지나온 세월』, 1967).”



옹주의 결혼생활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1955년 남편에게 버림받고 딸 마사에(正惠)마저 잃었으며, 1946년부터 15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 1962년에야 다시 고국 땅을 밟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향년 76세로 세상을 뜬 옹주의 곤고한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정문일침(頂門一鍼)이 아닐까?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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